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랑 (문단 편집) === [[고려시대]] === >[[복희(중국 신화)|복희]]씨가 [[천하]]의 왕이 된 이래, / 自伏羲氏之王天下 >[[태조]]가 [[삼한]]의 왕이 된 것보다 높은 것이 있는가? / 莫高太祖之三韓 >막고사산에 있는 신인은, / 邈姑射山之有神人 >분명히 [[경주 월성|월성]]의 네 사람이다. / 宛是月城之四子 >(운운)[* 편집됐다는 뜻이다. 파한집은 시를 발췌해서 실었다.] >복숭아 꽃이 흘러간 물은 없어지고, / 桃花流水杳然去 >참된 발자취는 비록 찾기 어렵지만, / 雖眞跡之難尋 >[[신라|고가]]의 유속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 古家遺俗猶有存 >황천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믿는다! / 信皇天之未喪 >(운운) >[[요임금|고]]의 조정은 아니래도, / 非高[* 고려 제3대 임금 정종 왕요(堯)의 휘를 피한 것이다.]之庭 >백수를 통솔하는 노래의 예를 얻으니, / 得詣百獸率舞之列 >무릇 [[고려|주]]의 선비들이, / 凡周[* 고려를 주나라에 비유한 것으로 [[외왕내제]] 성격이 드러난다.]之士 >모두 소자유조의 노래를 부르고 있도다. / 皆歌小子有造之章 >---- > - [[파한집]] 권하에 기록된 고려시대 선랑에 관한 표문. 곽동순 作.[* 전문은 동문선 제31권에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화랑제도가 부활하지는 못했지만 [[신라]]의 화랑 문화가 어느 정도 계승되었다. 국왕이 [[팔관회]]에서 신라에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하면서 귀족 자제 몇을 뽑아 춤을 추게 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를 선랑이라 하였다. [[무당]]들이 굿판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이는 [[고려시대]] [[불교]]의례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려]]가 신라 불교의 전통을 받아들였다는 자의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인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과거 화랑들이 모여서 [[승려]]들의 지도를 받고 학문을 연마하던 것처럼 고려 사회에서도 승려 밑에서 글을 배우던 사람들 중 얼굴과 머리카락이 고운 남자를 선랑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799&cid=49632&categoryId=49632|#]] 이들은 불교신앙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조직인 향도에 구성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26796&cid=46620&categoryId=46620|#]] [[고려사]]에 의하면 어릴 때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 글을 익혔는데, 그 중 면수(面首)의 경우 [[승려]]든 속세 사람이든 모두 그들을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불렀고, 따르는 무리들이 때로는 1백 명이나 1천 명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충렬왕]] 때 [[민적]]이라는 인물은 천성이 명민하고 용모가 훤칠하여 한번 본 사람은 모두 사랑할 정도였고 [[충렬왕]]이 이 소식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국선]]으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즉 고려 후기인 원 간섭기까지도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들과 같은 화랑제도의 기본 뼈대에 해당하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는 것. 그 외에 귀족 자제의 호송임무를 맡은 잡류직[* 지금으로 치면 말단 공무원이지만 고위층 자제를 수행하는 수행원 쯤 된다고 볼 수 있다.]을 선랑이라고 부르거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4959&cid=46621&categoryId=46621|#]] 고려시대 행사의 연행자(진행자)를 선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53130&cid=42607&categoryId=42607|#]] 특기할 만한 점은 고려시대에는 화랑이라는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고 주로 선랑으로 지칭된다. 팔관회도 고려시대에는 불교적 색채가 옅어지고 토속문화 혹은 도교적 색채가 다소 강해졌던 것처럼 화랑의 경우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예종(고려)]]이 [[서경(고려)|서경]](현 [[평양시]])의 [[용덕궁]]에 들러 내린 말에 의하면 고관자제들이 국선이 되는 걸 기피하게 되었다고 언급하는데 공식 출세코스이자 사회의 핵심조직이었던 신라의 화랑제도와는 달리 선랑문화는 일종의 민간풍습으로 명맥을 이어가게 되면서 [[음서]]나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고 또한 유교적 색채가 강해진 [[문벌귀족]] 자제들이 기피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군사교육제도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화랑제도와는 달리 선랑문화는 그러한 성격은 완전히 탈피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