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랑 (문단 편집) == [[화랑세기#s-2|화랑세기 필사본]]에서 == 통일[[신라]] 초기에 살았던 [[김대문]]이 화랑을 다룬 [[화랑세기]]를 저술하였으나 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89년에 [[박창화]]의 유족들이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필사본이 남아있다.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를 보면 [[신라]]의 개방된 성문화를 묘사하고 있다. 그간 남자다움, 호국무사 정도로 묘사되어 왔던 화랑이었지만, 1989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됨에 따라 논란에 불이 붙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의 [[동성애]], 파벌 다툼, 문란한 성의식 등의 기존 사학계의 관점에서 '전혀 아닌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사학계나 재야사학자들간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켜 10년 동안 논란이 지속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 사회에서 동성애[* 정확히는 성인 남성과 소년, 소년간의 동성애가 크게 번졌다.]는 어느 국가에서든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진솔한 사랑은 소년과의 사랑이다."라고 할 정도로 동성애가 성행했으며 오히려 고결하고 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 이것은 여성과의 사랑이 번식에서 나오는 욕구라는 식으로 여겨져서 그렇다. 게다가 당시 여성 간의 사랑은 가장 미천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러모로 성차별적인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피우지 못한 꽃'에 비유되는 소년들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확인된다. 이 동성애는 유명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겼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도 보다 예술적이고 정적인 관점에서 동성애를 즐겼다. 또한, 남자다움으로 상징되는 [[사무라이]]들도 동성애를 즐긴 흔적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구태여 화랑이 동성애를 했다해서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가 이성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써놓은 철학자도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 다만 폄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얘기가 곧 화랑의 동성애가 사실이라거나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인 것 또한 아니다. 고대의 동성애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고대의 동성애에 관한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의 경우에는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문헌 자체가 없다. 문화적인 연관관계가 희박한 타국의, 분명한 증거가 남아있는 사례를 들어 별 증거도 없이 화랑의 동성애를 추단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 않다. 또한, 예전에는 남성들끼리 매우 친하거나 매우 존경하는 관계일 경우 '친하다'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다' 수준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단 [[영어]]의 'love'를 보자. 그리고 [[라틴어]]에서 친구를 의미하는 'AMICUS'는 '''사랑하다'''라는 뜻의 'AMARE'에서 온 단어. 그리고 [[한국어]]에서도 '사랑하다'라는 단어는 원래 '''깊게 생각하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즉, '곁에 있지 않아도 언제나 그 사람을 계속 깊게 생각하게 된다 → 사랑한다'라는 식의 의미 변화라고 하는데, 곁에 있지 않아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굳이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어도 지극히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흔한 일 아닌가?]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작품 일부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개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친하다', 혹은 '매우 존경한다'는 것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화랑세기]]에 묘사된 동성애적인 이야기가 동성애가 아닌 '매우 친하다' 정도의 표현일 수 있다. 당장 조선시대의 시사를 보면 신하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연모의 감정으로 표현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이걸 두고 조선 양반사회에서는 동성애가 만연했다는 근거로 삼는 사람은 없다. 문란한 성의식 같은 경우도 [[화랑세기]]의 것은 마복자(磨腹子) 등과 같이 압권인 것도 있으나, 당시 삼국의 성의식이 오히려 현대의 [[대한민국]]보다 개방되어 있을 수 있다는 암시들이 곳곳에 퍼져 있으니, 굳이 신라에 국한시켜 화랑을 폄훼하는데 사용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신라시대 [[토우]]들을 보면 온갖 체위로 성행위를 즐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하지만 아직 [[화랑세기]]는 사료로서 가치 여부가 논란 중임을 고려해야 하며, 이 내용을 실제 역사로 곧이 곧대로 믿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화랑세기 위서론 중 [[박창화]]가 쓴 일종의 역사 동인지()라는 설은 상당히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화랑세기]] 문서로. 사실 국문학계의 반발 때문에 '''논란'''이라고 하는 것이지 실상은 [[화랑세기]]가 위작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혀져 가는 중이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결정적인데 여기에 적혀져 있는 화랑들의 이름이 화랑세기에 적힌 화랑들의 명단과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다. 천전리 각석에 명단이 없는 것은 신라 모든 화랑 천전리에 갈 이유는 없어 교차 검증되는 이름이 없을수도 있지만, 빼도박도 못하는 위서증거가 나왔다. 자장율사의 아버지 무림공이 그것인데, 당시 일연은 국왕 이름인 무를 피휘하여 호림공으로 적었으나, 박창화의 화랑세기에는 호림공이라고 적고 마치 본명같이 쓰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