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랑 (문단 편집) == 유래 == 그 시작은 [[진흥왕]] 때로 기원은 [[신라]]에서 제일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 외모에 대한 언급을 잘 하지 않는 정사에서 [[미녀]]라고 대놓고 써 있다.] 둘을 뽑아 그들을 매개로 인재를 모으는 [[원화]] 제도였는데, 두 여성 원화 [[남모]]와 [[준정]]이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한 나머지 살인 사건이 일어나 원화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후 같은 역할이지만 여자 대신 곱상한 남자들을 모집해서 화랑이라고 부르게 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화랑 제도를 만들었다는 576년 이전에도 [[사다함]] 같은 화랑이 존재하였으므로 이전부터 신라에 비슷한 개념의 청소년 조직이 존재는 하고 있었고, 삼국사기 576년의 기사는 화랑 제도를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말년인 576년 한 해에 원화를 만들었다 없애고 다시 화랑을 창설했다고 되어있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원화를 만들었다 폐지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 화랑을 만들었다고 되어있어서 1차 사료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역사적으로 진흥왕 시대는 과거 [[경상북도]]와 주변 일대에 머물던 신라의 영토가 [[고구려]], [[백제]], [[가야]]와의 전쟁 승리를 통해 [[함경남도]]와 [[경기도]], [[경상남도]] 등 3~4배 이상으로 늘어났고 통치하는 백성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던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 획득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능력을 갖춘 관료가 '갑자기 많이' 필요했으며, 마침 진흥왕 재위 후반에 화랑제도를 창설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화랑의 교리를 담은 경전 '선사(仙史)'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며,[* [[김대문]]의 [[화랑세기]]와 같은 책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2번 단락의 필사본이 아닌 1번 단락] 책 자체는 현대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삼국사기에서 간추린 내용상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사회와 동떨어진 가르침이 아니라 백성들과 밀접하고 교화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주보돈]] 교수는 진흥왕 재위 후반부에 창설한 화랑 제도는 바로 당시의 대신이던 [[거칠부]]가 주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거칠부]] 본인이 어릴 적 승려로 출가해 지식을 쌓거나 유명한 승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적국 고구려 땅까지 포함해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로서 활약하는 생애 전반부 자체가 훗날 화랑의 교육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침 화랑제도를 창설한 진흥왕 말년 시기에 거칠부는 [[이사부]]의 뒤를 이어 최고위직에 있었으므로 충분히 임금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위치였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