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이난시 (문단 편집) === 회남국 === 회남(淮南)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03년에 [[항우]] 측에서 유방에게 귀부한 [[영포]](英布)를 회남왕에 봉하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회남국의 수도는 현재의 루안에 위치해있었는데, 영포는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기원전 196년) 이후 유방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 유장(劉長)[* 시호는 여왕이다. 조왕 장오가 유방에게 바친 애첩의 소생이며, 한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민월을 끌어들여 반역을 꾀하였다가 유배형에 처해졌고 그 와중에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굶어 죽었다.]을 회남왕으로 삼았고 수춘이 새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유장은 기원전 174년에 반역죄에 연루되어 촉으로 유배를 떠나던 중 객사하였다. 기원전 172년, 유장의 네 아들을 측은하게 여긴 [[한문제]]는 그들을 복권시켜 제후로 삼았고 장성하자 왕으로 봉하였다. (기원전 164년) 한편, 회남왕의 작위는 기원전 168년에 부활하여 성양공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기원전 164년에 유장의 장남 [[유안]](劉安)이 회남왕이 되자 성양으로 돌아갔다. 유안은 도교에 심취해 있었고 신선이 되고자 선식을 개발하였는데, 왕여안(王厲安)이라는 도인과 함께 만든 음식이 바로 [[두부]]이다. 화이난에서는 지금도 두부 축제가 열린다. 도교를 바탕으로 박식한 지식을 쌓은 유안은 일종의 백과사전인 [[회남자]](淮南子)를 편찬하였는데 그 일부는 현존한다. 기원전 154년,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 유안도 그에 가담하고자 하였으나 승상이 미리 조정에 도움을 요청하여 무산되었다. 기원전 122년, 유안은 반란을 꾀하다가 들통나 자살하였고 회남국은 한세기 전의 지명인 구강군으로 개편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안이 아버지 유장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자녀가 없는 한무제의 죽음에 대비하여 거병을 준비하였다고 서술하였지만 유안의 지식에 감탄한 한무제의 총애를 받은 것과 그의 사후 무제가 유안의 반란을 고발하였던 오피를 사사한 것을 보아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