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정 (문단 편집) == 고증 == '''명불허전 MBC 사극 막장 고증의 후속작으로 손색이 없다.'''[* 이 드라마가 비난을 받자, [[징비록(드라마)|징비록]]이 정통대하사극 중에서 역사성이 충실하다는 점이 부각되기도 했다.] 사극이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아까운 수준이다. 그냥 [[판타지]]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된다. 전작인 [[빛나거나 미치거나]]처럼 방송 전에 항상 각색하여 실제 역사와 다르다는 것을 사전공지하면 모를까, 화정은 그런 거 없다. 캐릭터간의 관계, 성격 설정과 그에 따른 갈등묘사는 훌륭하지만,[* 갈등이라고 하는데 그다지 갈등이 크지 않다. 특히 [[광해군]]과 [[정명공주]]는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이게 잘 묘사되지 않았다. 만약 이야기대로라면 광해군과 공주는 철저한 애증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동복 남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사람을 별다른 갈등 없이 협조하고 용서한다. 그리고 실제로 동생의 복수를 위해 반란까지 일으킨 인조가 오히려 동생을 질투해서 죽였다는 등 여러 모로 헛점이 많은 편이다.] 역사적 사실로 따져보면 왜곡 안 한 게 드물 정도다. * MBC 드라마답게 극 내내 예언서라는 걸 들먹이며 [[정명공주]]만이 진정한 조선의 주인이라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도사를 등장시키며, [[정명공주]]를 [[일본]]의 화약 제작소로 보낸다. 게다가 선조 독살설이나 김제남[* [[인목왕후]]의 아버지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서인에 가깝긴 하지만 무리짓는 걸 싫어하는 성품에 [[중종(조선)|중종]] 때 김안로가 몰락하며 기울어버린 가세 탓에 당색은 매우 옅었고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다. 그의 가문이 완전히 서인이 되는 건 [[계축옥사]]로 대북과 불구대천 원수가 되면서부터다.]이 서인의 영수로 나오는 등 권력암투로만 모든 것을 풀어가려고 한다는 것도 문제다. * 4회에 [[고구마]], [[감자]] 등이 나오는데 (나오는 장면의 배경은 일본 광산이다. 우리나라가 아니다.)그 당시 우리나라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구마는 [[영조]] 때, 감자는 의외로 [[순조]] 때나 되어서야 들어왔다.)[* 애초에 감자는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면서 들어온 작물이다.] * 화약 이야기도 과장이 심하다. [[임진왜란]] 이후 [[화약]] 개발은 화약의 성능이나 새로 개발하는 것이 아닌, 생산성 높이기 위한 개량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19세기까지 화약은 단 하나 [[흑색화약]]뿐이다.] 물론 화약의 주요 3재료중에 하나인 [[유황]]이나 화포 제작에 쓰는 구리가 모두 수입품이긴 했지만, 극에서처럼 처음부터 화약을 만드는 묘사는 지나친 과장이며, 당시 기록에 새로 화약을 개발했다는 기록들이 조금 있긴 하지만 이는 화약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제조법에 해당된다. 그러나 화정 속 조선은 [[최무선]]이 존재하지 않는 평행세계의 조선이라도 되는지 17세기가 되도록 독자적인 화약제조와 유황제련법을 몰라서 [[명나라]]가 주는 약간의 화약에 의존하는 개막장 상태를 보여준다. 알다시피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화약제조법과 발전된 화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기술들은 [[임진왜란]] 당시 투항한 [[항왜]]들로 인하여 더욱 발전하는데 말이다. * 드라마 속에서의 화기도감과 화학 이야기는 결국 실제 역사 속에서 [[광해군]]이 기존의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전격 개편해 파진포라는 개량형 화포를 생산시킨 것[* 광해군은 입으로만 "[[후금]]이 성을 무시하고 기동전을 벌이면 어쩔 거냐"고 한다. 참고로 이건 광해군이 혜안이 있어 한 말이 아니고, 선조 때부터 심심하면 제기되고 인조때도 수시로 하던 말이다. 아무튼 광해군은 정작 그에 맞설 방안 마련에는 무심한 편이었고 특히 기병육성에 굉장히 소홀했는데 그나마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조총. 다만 이것도 조총 비율이 지나치게 올라가는 부작용을 초래했다.]을 더 극적이게 연출하기 위해 각색한 듯 하다. * 배경이 조선 중기가 아닌 조선시대 배경 사극에서 두석린갑이 나오는 고증 오류를 그대로 답습했다. 물론 본작의 후반부는 그나마 조선 후기에 가까운 시기이긴 하지만, 조선에서 두석린갑이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본작의 후반부보다도 더욱 나중에 있었던 일이다. * [[대동법]] 부분도 학계의 최신학설을 무시한 채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동법]]은 어디까지나 이원익을 필두로 한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시행했고 [[광해군]]은 이것의 실효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확대를 막았으며 대동법 자체를 폐지하려하기도 했다. 게다가 재위기간 내내 시행한 영건사업과 연관시켜보면 그러한 반대가 무슨 대안이 있어서라고 보기도 힘들다. 오히려 그의 측근인 기자헌이 방납커넥션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점을 고려해 훨씬 악의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즉위과정이 광해군보다 훨씬 불안했던 [[인조]]가 오히려 이 부분에선 더 앞서갔다.] * 또 다른 왜곡으로는 [[서인]]이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다. [[영창대군]] 지지세력은 [[서인]]이 아니라 [[북인]]에서 갈라져 나온 [[소북]], 그중에서도 유영경 파인 탁소북이었다. 줄타기 잘못한 탁소북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해군]]의 왕위계승을 인정했다. 애초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게 드라마 내에서 만큼 불안요소였다는 견해 자체가 어불성설로, 사학계에선 이에 대해 진지하게 다뤄진바 없다. 선조 사망시점에 겨우 2살인 어린 왕자가 10년 넘게 세자였고 왜란 때의 활약으로 능력도 입증된 형과 경쟁이 될거라 생각하는 신료들은 탁소북 말곤 없었다. 게다가 선조는 [[임진왜란]] 때 신하들이 선위를 요구하려했을 정도로 권위가 실추되었기에 2살짜리로 아무 하자없는 광해군을 밀어낼 힘같은 건 없었다.[* 세자를 갈아치웠던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양녕의 지지세력이 될 외척을 시전에 모두 제거한데다 양녕의 비행이 수년간 쉬지않고 이어졌으며 본인 즉위 명분이 택현(擇賢, 장남이 아니라 현명한 아들을 택함)에 정상적인 적장자 계승이 한번도 이뤄지지 않은 국초라 가능했다. 왕조국가고 뭐고 간에 선조가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쟁국본에서 알 수 있듯 선조와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권위를 지닌 명 황제 [[만력제]]도 후계구도는 자기 마음대로 못 정했다.] 폐모살제로 광해군이 지방 유림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도 도저히 경쟁자가 될 수 없는 [[영창대군]]을 옥사를 조작해 제거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인목왕후]]는 광해군에게 어머니이고, 딱히 부딪친 적도 없으며 선조 사후 정권을 그냥 주었다. 그럼에도 광해군이 조작된 옥사로 그녀의 가족들을 죽이고 그녀를 유폐했으니 누가 봐도 그냥 패륜이었다.] * 그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조정에서 약세였을 서인이 다수파고 북인이 소수파라고 나오는 것이다. 최영경 옥사 사건으로 서인과 북인이 대립할 당시 선조가 북인을 지지하여 서인은 몰락했고 광해군 정권까지 대북에 밀려 만년 야당신세였던 데다가 정작 그 당시에 서인들은 조정에 있지도 않았다. 인조반정 주도세력은 몇몇 무장이나 지방관들 제외하면 하급관리들이거나 백수들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오히려 자신이 이이첨을 필두로 한 대북파를 너무 키워줘서 문제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대북파가 광해군과 대립한 것이 바로 대명의리다. 광해군은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외교 기조를 유지하고자 했다.(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그가 만든게 아니라 선조대의 외교정책을 이어받은 것이다. 선조는 진작에 누루하치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명과 접촉하고 여진족 동향파악 및 강온양면책을 사용했다. 선조가 욕은 먹지만, 정작 대세와 정세 파악에는 뛰어났다.) 그러나 당파중 가장 강경파로 의리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대북은 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있어도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나섰다. 당연히 이의 앞장 선 사람이 [[이이첨]]이다. 정작 광해군을 몰아 낸 서인들은 대북파와 달리 유연한 외교를 주장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서인정권은 후금에 세폐를 바치고 형제관계를 맺는 등 최대한 맞춰주었다. 이들이 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건 산해관도 못뚫은 명과의 단교와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조선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요청을 하면서부터였다. 물론 이런 서인들을 내친 건 광해군이고 자연히 지지세력 없이 조선은 약해서 도움이 안 될 거라는 말만 반복하다 신하들에게 끌려갔다.][* 더하여 이런 외교현황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영건사업은 안 쉬고 계속 진행해서 재정부족과 수탈이 극심했고 군량미와 염초까지 전용했기에 광해군이 치밀한 고려 끝에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는 통설은 부정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보다는 그냥 수탈과 궁궐공사 방해받기 싫어서 그랬다는 게 더 정확하다.] * 거기다가 [[김류]], [[이귀]] 등 훗날 인조반정 주역들이 모조리 대명 사대주의자로 나오고 광해군의 화기도감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으로 나온다. 정작 그 당시에 [[명나라]]를 위해 출병하자는 쪽은 서인이 아니라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집권당 대북세력이었다. 비록 인조반정 후 서인들의 실책이 크기는 해도 국방력 강화와 민생에 아주 무능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조반정 후 이들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국방과 민생에 신경썼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도 척을 지면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이귀는 "조선은 자체 화약개발을 하면 안되고 명나라에서 조금씩 주는 화약만으로 조선은 만족해야 한다."라는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데 실상은 아예 최명길과 함께 "고려도 송과 금을 함께 섬겼으니 청에게 칭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저 당시에 이귀는 유배중이었고 김류는 조정에서 쫓겨나 있었다. * 20화 전후로 서인이 명나라 파병을 반대하고 대북은 찬성하는데 이는 역사와 동일하다. (놀랍다!) * 쓸데없이 [[일본]] [[고증]]은 잘 되어 있다. 이는 일본까지 직접 가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단역들조차 일본 현지 배우들을 썼다.[* 일본에 대해서 나온다면 일본에 끌려간 포로의 대해서도 나왔다면 좋았을 것이다. 당시 일본 포로로 있던 선비 중 1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에 욕을 써놓기도 하는 등 여러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선비 중에는 목숨 걸고 탈출하거나, 탈출을 돕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명공주]]가 이왕 일본 포로로 갔으면 이에 대해 묘사했으면 좋았을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초반부에 나온 일본 남성들의 [[촌마게]]가 [[에도 시대]] 중후기 형태인 것은 고증 오류인데, 당시 일본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말기 ~ 에도 시대 초기였기 때문에 [[불멸의 이순신]] 및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 나온 것과 같은 형태의 촌마게가 나와야 한다. 사실 이는 일본 현지에서 촬영할 당시 에도 시대 중후기 배경 사극 세트장을 이용한 탓도 있을 것이다. *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 대해서 나오면서, [[항왜]]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괄의 난]] 때 100명이 넘는 항왜가 선봉장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정충신에 대해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원익은 병풍이라도 나왔지만, 정충신은 일개 병졸에서 이순신 장군과 동등한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끝까지 나라를 저버리지 않고, 이괄의 난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단교를 반대한 인물이다. 만약 정충신이 [[정명공주]]의 지원자였다면, 어떻게 나왔을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 드라마라는 점을 감안하면 잘 묘사된 것이 화약을 만드거나, 전쟁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이다. 흔히 드라마를 보면 전쟁이 일어나면 혼란스럽게만 나온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다독이는데 이에 한 백성이 "임란 때처럼 죽으라고"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전쟁의 위협(인조가 선동했다.)을 두려워 하는 백성들이 나오는데 실제 지배층은 도망가면 그만이지만, 백성들은 죽게 된다. 그나마 선비들이 의병을 조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들도 관직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결국 백성이다. * 명청교체기라는 격동기의 특징상 여러 사건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음에도 그것이 실제의 역사처럼 흘러가진 않았다. 또한 그런 사건들을 제대로 화면에 담아내지도 못했다. [[사르후 전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영원성 전투]]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큰 사건이 쉴새 없이 터져나왔는데 정작 주인공인 [[정명공주]]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었지 실제 역사에서의 모습들은 어디론가 증발. * 다만 전투씬 자체는 제작비나 시나리오의 악조건에도 나름 돋보이긴 했다. [[사르후 전투]]의 경우 조총의 사격 방식[* 바로 이전까지 화정에서 조총은, 삼수병(포수-살수-사수)의 묘사되며, 사극에서 보기 어렵다는 [[불랑기포]](비슷한 시기 사극으로 [[징비록]]에서 불량기포가 동원된 바가 있다.). 하지만 사극에서 보기 어려운 물건이긴 마찬가지.]도 모습을 드러냈다. 모양이 이상하긴 하지만 두정갑도 있다. 그리고 야전이랍시고 병사들만 우르르 줄을 선 게 아니라 참호와 목조 장애물로 기병을 저지하려고 하는 장면도 보인다. 후금군 지휘관은 몇 마디 수준이긴 해도 [[만주어]]를 쓴다![* 이후 몇 화까지는 [[만주족]] 인물들은 모두 [[만주어]]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 관련 전공자가 붙어서 지도라도 해준 게 아닐까?] 후금군의 갑옷도 어느 정도 실제 모양을 따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사르후 전투만 따로 올라온 영상은 없기 때문에. * 그러나 사르후 전투에 대한 전개는 몹시 개판이다. 실제 역사와 일치하는 것은 패전 밖에 없을 정도. 화정에서 사르후 전투 전개를 그대로 옮겨보자면... >명군과 함께 진격 중이던 조선군은 총병의 결정에 따라 선봉에 서게 되면서 명군의 화살받이가 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조선군은 삼수병으로 후금군을 격퇴하겠다는 작전을 기획하고, 그걸 실제로 해서, 후금군을 격퇴한다. 작중에서 직접 언급되는 전과는 병사 수천과 기마 수백이며, 조선군의 피해는 100여 명으로 나온다. 당연한 소리지만 '''실제 역사에선 조선군은 이렇게 승리하지 않았고, 이런 전과를 세우지도 않았다!''' 그래놓고 조선군이 패전한 데에는 명군이 갑자기 짐을 싸서 도망쳤기 때문이라고 나온다. 이건 조선은 잘 싸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명군이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전투 내용 자체를 왜곡버린 것이다. 참고로 명군의 갑옷은 이전 사극에서 쓰던 걸 창고에서 꺼내온 것도 있는 모양. *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에 대한 묘사는 앞서 [[사르후 전투]]의 그것처럼 전투씬은 나름 꾸며보기는 했지만 역시나 사건만 따오고 내용은 마음대로 창작해서 우겨넣었다. 고증에 나름 신경을 써봤자 시나리오가 대체역사를 써버리니 원... 모든 사건이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버려서 발생하는 문제로 보인다. * 아무리 드라마가 픽션이지만 인물의 나이와 행적의 시기까지 바꾸어버렸다. 실제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날 시기에 [[소용 조씨]]는 1616년생으로 당시 8살이었고 1630년 [[인열왕후]]의 명으로 15살에 궁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드라마의 [[소용 조씨]]는 [[광해군]] 때부터 대전 나인이었고 또한 [[인조반정]]을 돕지를 않나.. 인조와 함께 [[정명공주]]와 대립한다. * 시청자의 배려인지 아니면 잔인한 장면을 삭제하기 위함인지 왕조 국가가 지나치게 현대적 모습으로 각색되었다. 왕에게 함부로 맞서는 공주[* 조선 시대에는 왕족의 정치참여가 제한되어 있는데다 사헌부의 주 시찰 대상이라 행동 한 번 잘못해도 탄핵당할 수 있었다. 그나마 왕의 비호를 받아야 탄핵의 폭풍으로 부터 무사할 수 있지만 극중의 정명공주처럼 왕에게 제대로 찍혔을 경우엔 한방에 훅 갈 수 있었다.]나, 느슨하게 진행되는 친국[* 실제로 인조 시대에 추국장에 끌려오면 자복하고 처형당하거나 끝까지 고문을 견디다 옥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조작된 증거를 찾아냈다고 옥사를 중단하고 죄인을 방면하는건 그저 소설속 이야기일뿐...] 등 여러 모로 현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징비록에서는 별 볼일 없게 묘사되는 선조가 그냥 마음의 안 든다는 이유로 잡다가 고문하고 백의종군시키는 등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화정>과 비슷한 장르인 <[[공주의 남자]]>, <[[뿌리깊은 나무(SBS)|뿌리깊은 나무]]>도 역모에 대해서 잘 묘사된다. 왕의 의지 하나로 죄 없이 박살나는 장면이 잘 나온다. 특히 인조는 온갖 트집을 잡아 세자빈과 그녀의 친정을 박살내고, 손자들을 귀양까지 보냈다. * 국제정세의 묘사가 편협한 편이다. 특히 [[명나라]]에 대해서 좋게 나오지 않는다. 당시 황제는 [[만력제]]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도합 20만의 가까운 대군과 기근 때 대규모 지원 등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사르후 전투]]로 피해 받은 조선에게 은자를 내리는 등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를 인정하지 않는 등 명나라는 친 광해군적이었다. 그리고 후금이 강성하게 묘사되는데 실제 사르후 전투 이후 요동 일대까지 함락했다. 그러나 산해관에서 후금 16만 대군이 몰살당한 것이나, 2차로 영원성을 쳤다가 참패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 결국 박로가 갔지만,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 애당초 단순 외교 차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화정의 당시 묘사는 굉장히 편협한 편이다. 뭐 화정 자체가 치열한 외교전을 보이는 드라마가 아닌 것은 맞으나, 최소한 당시 사람들이 자존심이나 대명의리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묘사하지 않아 아쉽다. * 1636년 강화도 수비를 맡은 강화도검찰사가 되는 [[김경징]]의 모습이 그려진다. 실제 역사와 같이 소인배처럼 자기 식솔들만 배에 먼저 태우지 않나.. 강화도에 와서 술만 쳐마시는 그의 모습을 잘 묘사했지만.. 정명공주가 강화도에서 그를 질책하고 또한 명을 내려 강화도 함락이 그려지지 않았다.[* 원래 실제 역사라면 강화도는 병자호란 때 함락이 되고 그로 인해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맛보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원래대로라면 망나니 같은 그의 추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고 1637년에 사약을 마시고 죽어야 하지만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에도 그는 드라마에서 아버지 [[김류]]와 함께 [[김자점]]의 편에서 정명공주와 그녀의 일파에 대립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의 침소봉대에서 시작된 [[소현세자]] 과대평가는 본작도 예외가 아니라서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려하고 천주교에 호의적인 이미지로 왜곡되었다. 설령 실제 소현세자가 개인적으로는 천주교에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해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 극이 진행될수록 인조를 두둔하는 모습이 나온다. 말년에 병으로 쓰러지자, 왕권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세자빈과 그 일족 그리고 손자까지 내쳤다. 그리고 정명공주가 저주를 내렸다는 소문이 돌아 정명공주 사람들을 모조리는 죽이는 내용은 없다. 그냥 회개했다는 것으로 끝이다. 초반부에서의 광해군 미화와는 모순되는 문제점인데, 그냥 작품의 내용이 일관성을 잃었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 촬영장 근처의 고층 건물들이 그대로 보이는 일이 있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고증오류라기보다는 [[옥의 티]]. * 그나마 2000년대 이후 사극중에서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에 대한 비중이 어느정도 있고, 그녀에 대한 고증 역시도 약간 충실한 모습은[* 약간인 이유는 귀인 조씨를 입궁시킨 주선자가 인열왕후라는 점을 아예 비틀었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다. 그래서인지 인열왕후에 대해 소개하는 각종 커뮤니티 글이나 뉴스 기사 등지에서 화정에서 나온 인열왕후의 장면이 자주 인용 내지 불펌되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