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차 (문단 편집) === 화차라는 명칭의 원조 논쟁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E6%9E%B6%E7%81%AB%E6%88%B0%E8%BB%8A.jpg]]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아있는 가화전차를 근거로, 한국이 이를 베껴다 만든 것이 화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화전차는 [[다발화전]]과 백자총통을 수레에 싣고 정면에서 싸우는 야전용 전차였다. 따라서 '''다연장 폭발 로켓의 대규모 발사를 제어하는 곡사포 시스템'''으로서 발전한 조선의 화거류 병기와는 기초개념이 살짝 다르다.[* 대체로 서구권에서 화차를 인정하는 것도 대규모 곡사/발사 제어를 근본에 두고 설계한 병기라는 특성 때문이다.] 사료에서 가화전차의 등장은 1403년 발간된 《화룡경》이라는 책에 나오지만, 문제는 이게 위서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가정제]] 말년에 만들어진 것이고 본문 내용에서도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판단되는 내용들이 나와 신용할 수 없다. [[http://zh.wikipedia.org/wiki/%E7%81%AB%E9%BE%99%E7%BB%8F|관련 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917&category_type=series|관련 네이버캐스트]] 더욱이 화룡경에는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 가화전차의 모습이 나오는 중국 문헌은 <무비지>인데, 무비지는 '''1621년 만들어진 책'''이고, 여기 나오는 가화전차와 화룡경에 나오는 가화전차가 같다는 증거는 없다. 한국의 화차와의 연관성은 더욱 더 입증할 수가 없다.[* 무비지에는 특정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http://ulanbatu.cafe24.com/zeroboard/zboard.php?id=imjin&page=1&sn1=&divpage=1&sn=on&ss=on&sc=on&keyword=%BD%C5%B1%E2%C0%FC&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62|링크]] : 별무사(신재호)님 댓글 참조.] [[파일:external/www.grandhistorian.com/rocketlauncher.png]] [[파일:external/64756e7d5a9f0ea0c2f22c27c45db302a245620d6d5e47daea0032930d14d489.jpg]] 무비지에 실린 신화전병(위)와 화궤공적차(아래). 둘다 화차보다 문헌에 등장시기가 늦으며, 인지도도 낮아 한때 [[구글]]에서조차 자료를 찾기 힘들었지만 한국 영화 신기전으로 한국, 중국 간 논란이 붙으면서부터는 검색이 좀 낫다. 더욱이 단순히 문헌에 나오는 '''화기'''로서의 추측이 가능한 언급만을 따져도 '''이것도 한국의 화차가 앞선다.''' 왜냐하면 고려 말 권근이 쓴 최무선을 찬양하는 시에 화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찬양하는 진포대첩은 1380년 벌어진 전투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님의 계략이 때맞추어 태어나니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어도다 >바람 실은 전선은 새들도 못 따라가고 >화차(火車)는 우레소리를 울리며 진을 독촉하네. >주유가 갈대숲에 불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 >한신이 배다리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보냐 >이제 공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에 초상화 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 번 바다 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네 >하늘에 뻗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과 이름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긴 맹세가 어찌 긴 세월 후에까지 기다릴까 >응당 군사의 대권을 맡게 되어도다 >종묘사직은 경사롭고 나라는 안정을 찾았으니 >억만 백성의 목숨이 다시 소생하는도다.[* 출처: 청소년을 위한 한국과학사(정인홍 저)] 다만 위의 사료에서도 한국식 화차가 발사화기로서 확실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후 최무선의 아들이 개발한 조선 태종 시대의 화차는 문종화차와 흡사한 사격과 기동성을 중시한 성향이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설계도와 기록이 분명하게 전해 내려오는 이동식 + 다연장 + 곡사포 형식의 로켓은 문종화차가 최초'''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 영락제의 화차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건 성종실록에만 한 번 나오며 그 이전이나 이후의 실록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604018_001|본문은 아래와 같다.]] >성종 54권, 6년(1475 을미 / 명 성화(成化) 11년) 4월 18일(병신) 1번째기사 신숙주가 양계의 여러 진의 방비책 등에 관해서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領事) 홍윤성(洪允成)이 아뢰기를,건주위(建州衛)의 적이 두 번씩 침입하였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또 침입해 올 형세이며, 따라서 금년의 방비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진년5120) 에 신숙주(申叔舟)를 원수(元帥)로 삼아 야인(野人)을 토벌하였는데, 오랑캐들이 이에 보복하고자 근년에 노략질이 잦고, 기어이 이득을 얻으려고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하였다. 영사(領事) 신숙주(申叔舟)가 아뢰기를,세종께서 명나라 영락 황제(永樂皇帝)가 야인(野人)을 정벌하다가 포위되었으나 화차(火車)로써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 마침내 화차를 만들어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었는데, 지금은 폐기되고 정비되지 않아 유사시(有事時)에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기시(軍器寺)로 하여금 제조하게 하여 양계(兩界)의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고 항상 훈련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역대 병가(兵家)들의 공격용 무기와 수비용 무기에 각각 그 방략이 있습니다. 예문관(藝文館)의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전(史傳)을 널리 고증하여 아뢰게 하고, 무사(武士)로 하여금 각 진(陣)의 공격하고 수비하고 전투하고 행군하는 방책을 채택하여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세종실록에는 영락제의 화차에 관한 기록이 없고, 위의 기사는 중국의 화차를 들여왔다는 기록이 아니라 화차의 유용함이 전해졌다는 기록이다. 즉, 중국제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화차라는 대륙의 개념에 관한 논설에 가깝다. 가장 먼저 등장한 화차(火車)의 기록은 중국에 있다. 송나라 때 기록에도 화차는 나온다. 근데 이런 물건이다. [[파일:external/www.militaryreview.com/cha_10.jpg]] 보다시피 우리나라처럼 포탑의 기능을 강조한 전차가 아니라, 기름 가마와 간이 부뚜막을 수레에 장착해 적 성문을 파괴하는 데 쓰는 무기다. 이 화차는 [[수호전]]의 108 호걸 중에서 한명이자 지살성의 신화장군 [[위정국]]이 자주 쓰는 무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