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포 (문단 편집) == 역사 == [[중국]]에서 [[화약]]이 발명된 이후, 화약의 폭발력을 이용해 동그랗게 깎은 [[돌멩이]]나 철덩어리로 만들어진 볼링공 같은 형태의 [[사석포|폭발하지 않는 포탄을 던지는 원시적인 형태]]로 출발하였다.[* 사극과 같은 대중매체에서는 곧잘 포탄이 땅에 탄착하면 폭발하는 [[고폭탄]]의 형태로 표현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런 포탄이 보편화된 것은 한참 뒤에 일이다.] 처음에는 기동성이 낮은 대신 막강한 위력을 내는 공성전용 무기인 [[공성포]]로 개발되었지만, 나폴레옹 시대 기동성을 높인 [[야포]]가 전장을 누볐으며 현대는 더욱 고기동화한 [[자주포]]로 발전하였다. 해상에서는 [[함포]]로 개발되어 해전방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항공기의 등장에 따라 [[대공포]]로도 개발되었다. 서구권의 대포는 초창기엔 [[청동]]으로 제작되었는데 17세기 전까진 야금 기술의 한계로 철제 대포의 성능이 청동제보다 후달렸다. 당대의 제철 기술 문제와 쉽게 부식되는 현상으로 인해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이는데 대포 사격 시 갑자기 유폭해서 사람잡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청동제 대포가 아득히 좋았던 것도 아니라서 좀 쏘다 보면 깨지기 일쑤였으나 유폭하기 이전 단계에서 취약부위 등이 부풀어오르거나 실금이 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므로 그걸 빠르게 알아채고 새로운 대포로 교체하면 유폭사고를 최대한 막을 수 있어서 청동제 대포가 인기가 좋았다. 그러나 청동제는 제작 단가가 비쌌고 철제는 무게 증가를 감수하고 크기를 키워 두껍게 만들면 아주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닌 데다 청동제보다 철제의 제작비가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유폭 사고에 목숨이 걸린 일선 포병들은 철제 대포 보급을 탐탁치 않아 했지만 높으신 분들에 의해 철제 대포의 보급이 청동제를 점차 앞서나가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게에 민감한 군함에선 청동제를 선호했기 때문에 영국 같은 경우 1급함에는 청동포를 우선 배치하고 철제포는 육상에서 사용했다. || [[파일:EarlyCannonDeNobilitatibusSapientiiEtPrudentiisRegumManuscriptWalterdeMilemete1326.jpg|width=100%]] || 작고 위력이 약해 보병휴대병기 수준이었던 화약병기가 화포형태로 등장한 것은 14세기 [[백년전쟁]]이었다. 당시의 화포는 대포, Cannon으로 불렸으며 성벽에 설치하는 방어무기로서 성벽에 접근해 오는 공성탑을 파괴하는 용도였으나 공격용으로 성벽을 부술 만한 위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 [[파일:Siege_orleans.jpg|width=100%]] ||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0bdd03bd0c534641e1dfa9f97c44a5e.jpg|width=100%]] || 백년전쟁이 15세기로 넘어가면서 대포(cannon)의 성능 자체가 향상이 된 데 더해 프랑스군이 대포의 장약을 기준량보다 수배 더 많이 넣어 발사하는 위험천만한 방식으로 대포를 적극 활용하여 영국군의 성들을 효율적으로 함락해 나감에 따라 공성전에서 공자나 방자 모두에게 대포가 주력 병기가 되었다. 특히,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은 69문이나 되는 대포를 대량 운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초기형 박격포인 19톤짜리 Bombard도 이 공성전에서 활약하였다. 당대의 기준으로 거포답게 이동을 위해선 200명의 인력과 60마리의 황소가 필요한 데다가 7번만 쏴대면 포신이 과열되어 냉각 및 정비를 위해 1일이 소모되므로 쓰기 힘들긴 했으나 그 위력은 2차 대전 전차의 주포 위력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DSCF3327.jpg|width=100%]] || 화포가 공성전에서 벗어나 기동성을 갖게 된것은 [[후스 전쟁]](1419–1434)이 시초로, 화포에 바퀴를 달아 [[황소]]가 끌도록 했다. 그럼에도, 16세기까지의 화포는 크고 무거워 기동성이 떨어지고 발사속도가 느려 보병의 전진/후퇴 속도를 따르기 힘들었다. || [[파일:external/www.maritimearchaeology.com/Shell-Cutaway-Fort-Frederick-Western-MD-27-May-2006.jpg|width=100%]] || 17세기부터 대포에 여러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커다란 기술적 발전으로 추진화약인 장약을 가루상태가 아닌 포제-약협 단위로 장전하는 기술이 발명되면서 장전속도와 안전성에서 큰 도약이 있었다. 또한, 신관을 장착한 [[유탄]](작열탄)이 발명되면서 이를 곡사포와 박격포로 발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해전의 혁신을 가져오기도 했다. 굳이 곡사포와 박격포를 쓴 이유는 탄속이 느리고 포구압력이 낮아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아직 신뢰성이 떨어지고 유폭확률이 높은 유탄 발사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기동성에도 30년 전쟁에 들어서면서 이른바 가죽포로 불리는 상당히 경량화된 화포가 개발된다. 화력을 포기하지만 야전에선 성벽을 부술 이유가 없으니 그만큼 약한 화력으로도 충분하단 판단으로 만들어진 물건으로, 이는 [[경량포]]란 분류로 나눠지게 된다. 곡사포가 발명되기 전까지의 화포는 저각발사용 대포 Cannon과 고각발사용 [[박격포]]로 구분됐으나, 대포를 고각으로 발사하는 곡사포가 등장하면서 기존 저각사격용 대포를 [[평사포]]로 다시 구분하게 되었다. || [[파일:external/www.historicships.com/NapoleonCannon12lbW.jpg|width=100%]] || 18세기 소형화/경량화로 기동성이 높아진 대포가 [[7년 전쟁]]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나폴레옹의 프랑스 육군은 화포의 구경, 탄약, 부품을 표준화함으로써 나폴레옹 군대의 승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 [[파일:external/images.yuku.com/ae28b1c710554cb1b1f42fee790aee90_r.jpg|width=100%]] || 19세기 후장포([[후미장전식]]) 기술이 발전하면서 포구속도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강선기술이 발전을 통해 명중률 또한 크게 향상되었는데 [[암스트롱포]]가 이를 모두 반영한 대표적인 19세기 화포이다.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roads_fr75.jpg|width=100%]] || 20세기 화포의 표준을 제시한 것은 1897년 개발된 [[1897년식 75mm 야포|French 75 야전평사포(field-gun)]]였다. 금속탄피형 포탄, 현대적 포대경, 공-유압식 [[주퇴복좌기]]등이 적용되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볼트액션 소총과 맞먹는 발사속도가 획기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