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희황후 (문단 편집) == 남양 등씨 가문의 딸에서 황후로 == 후한의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운대 28장]]에서 제1위로 기록된 태부(太傅) 등우(鄧禹)의 손녀이자 호강교위(護羌校尉) 등훈(鄧訓)의 딸이다. 등씨 일족은 [[형주]] 남양군의 유력 재지 세력으로 보이는데 유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근신하는 자세가 가풍이었다고 한다. 등수는 어린 나이부터 효심이 깊어 할머니가 그녀의 머리를 잘라주다가 목에 상처를 냈을 때에도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아픔을 참았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공(女工)보다는 유학(儒學)에 관심을 보였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등수를 '제생'(諸生; 태학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의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학식과 시사에 대한 출중한 식견은 등수의 아버지 등훈이 대소사를 10살 남짓한 어린 딸 등수와 상의했다는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제 영원(永元) 7년(95),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갔는데 미색이 출중하니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인(貴人)이 되었다. 항상 공손하고 조심스러우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황제의 후사가 많지 않음을 염려하여 자주 재인(才人)을 뽑아 황제에게 바치니 황제의 총애가 더욱 커졌다. 이때 황후였던 [[효화황후 음씨]]는 등씨를 질투하여 무고하고 저주하다가 폐위되니, 등씨가 새 황후가 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