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희황후 (문단 편집) == 섭정태후로서 후한을 통치하다 == 화제 원흥(元興) 원년(105), 화제가 붕어하고 태어난 지 100일밖에 안된 [[상제(후한)|상제]]가 즉위하니 황태후가 되어 임조칭제하였다. 상제는 즉위 1년을 간신히 넘기고 붕어하니, 공석이 된 제위에 [[안제(후한)|안제]]를 옹립하고 여전히 임조칭제하였다. 이 두 차례의 신제(新帝) 옹립에서 화제의 장자인 유승(劉勝)이 살아 있었지만, 고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물리친 이후 원망을 품었을까 염려하여 끝내 옹립하지 않았다. 백관들의 의중이 유승에게로 향해 있었고, 황제 후보에서 밀려난 후 평원왕(平原王)으로 봉함받고도 8년을 더 살아있었기에 고질병이 아닐 가능성도 농후하다. 상제 옹립 때에는 상제도 화제의 친자였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고르면서 어린 쪽을 택하였고, 안제 옹립 때에는 유승이 살아있어서 화제의 혈통이 단절된 것도 아님에도 방계인 안제를 데려다 세웠기에 등태후의 집권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등수는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비교적 덕정(德政)을 펼친 편이었다. 외척들의 발호를 항상 경계하였고, 재물을 아끼는 등 훌륭한 조처를 내렸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황제만이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권능을 많이 침해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한나라 황실의 역대 황제들이 모셔져있는 태묘(太廟)에 대한 제례가 화희황후 본인의 주도로 이루어진 점, 황태후 명의의 조서로 사면령을 발한 점, 자기 친족 등씨 일가뿐 아니라 황족 유씨에도 통제를 가한 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임조칭제하였던 황태후들의 전형적인 통치 행위이자 지향점임을 간과할 수 없지만, 등태후처럼 장기간에 걸쳐 실권을 장악한 경우는 또한 특수한 사례이기도 하다. 화희황후는 약 17년 동안 임조칭제하였는데, 후한이 존속한 196년을 백분율로 환산했을 때 약 8.67%나 점하는 시기였다. 또한 종신토록 섭정하였기에 관례와 혼인도 치르고 현대적 관점에서도 이미 성인이었던 안제가 직접 친정하였던 기간은 3.5년에 지나지 않는다. 안제 재위기간(106년 9월 21일 ~ 125년 4월 30일)의 대부분이 등태후의 통치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제 영녕(永寧) 2년(121) 3월에 붕어하니 나이 41세였다. 하희황후 등씨가 사망하고 3개월이 지난 뒤, 외척의 자격으로 정계에서 활약했던 등씨 일족은 안제의 [[유모]] 왕성(王聖) 등에게 황제를 바꾸려 시도했었다는 모함을 받아 숙청되었다. 다만 당시의 사인들이나 관료들 중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등씨 일족의 무고함을 신원하는 이들의 상주가 연이었고,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안제에 의해 등씨 일족은 유배에서 해재되어 낙양으로 돌아오는 등 일부 복권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