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빠 (문단 편집) === 유래 === 그 유래는 20세기 초반의 민족주의 사학이나 [[대종교]], [[증산도]] 등 민족주의 종교들까지 올라간다. 당대 한반도에서는 [[일본 제국|일제]]에 대한 반감으로 민족주의가 한창 고조되었고, [[천부경]] 같은 날조된 자료들도 이 시기의 것이 많다. 당시 민족주의 사학의 거두로 꼽히는 [[신채호]], [[정인보]] 등의 저서도 지금 읽어보면 과장과 억측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한국에 역사학의 체계 자체가 서지 못한 시기라는 점, 사료 데이터의 열람 및 축적이 지금보다 훨씬 수준이 낮아 [[교차검증]] 등의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 그나마 존재하는 사료들도 일제의 검열 등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못해 대중적인 비판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 학자 대부분이 항일운동 과정에서 많은 정신적 신체적 억압을 받았다는 점 등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역만을 근거로 신라와[* 사실 이건 환빠만의 문제가 아니라, 1980년대 운동권을 중심으로 퍼진 역사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김유신이 민족의 미래를 팔아먹은 배신자라며 매도하는 여론이 무려 2020년인 현재에까지 계속 존재할 만큼,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조선을 무조건 비난[* 정작 [[발해]]의 멸망 이후 조선은 한반도 최대 강역을 이루었다.]하고 고구려의 영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관은 일제가 추진한 내선일체의 일환인 '만선사관' 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식민사관]] 항목 참조. 실제로 [[만주국]] 건국에 앞서 일본은 '예전에 만주는 조선 영토였고, 조선은 지금 일본제국령이니 만주도 우리의 차지'라는 논리[* 지금 중국의 역사관이나 동북공정의 논리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지금 만주는 중국령이니 만주지방 옛 국가들의 역사는 죄다 중국사이고, 만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도 중국사이며 고구려가 장악했던 북한에도 지분이 있다는 식. ~~언젠가 만주 지방 뺏기고 역으로 당하고 나면 무슨 소리 할지 참 궁금하다~~]로 정당화를 시도하였고,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인사들은 '잃어버린 고구려 옛 땅으로' 같은 구호로 조선인의 만주 개척을 장려했다. 다만 환빠가 만선사관의 직계 후손은 아니고, 개중에서도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해서 왜곡의 범위를 넓힌 정도에 가깝다. 따지고 보면 만선사관에서 한민족이 '''과거''' 만주를 지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틀린 것이 아니고, 이를 '''현재(즉 일제강점기)'''의, 그것도 한국도 아닌 일본의 팽창주의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려는 과정에서의 논리적 비약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일제가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를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일제가 어떤 주장을 했다는 것이 반드시 틀렸다는 증명은 될 수 없고, 반대로 일제가 거부하고 탄압했던 생각이라고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저런 사관이 역사를 단편적으로 해석한다는 관점에서 비판해야지, 단순히 반일감정에 의존해서 "일제가 했으니 [[아몰랑]] 나쁜 것!"이라는 비판은 또 다른 민족적 배타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반면 환빠는 반드시 현대 한국의 팽창주의와 관계되어 있지도 않고, 고대 한민족의 강역을 올려잡는 '''역사'''왜곡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환빠의 주장대로 고대 한민족이 예컨대 [[모스크바]]를 지배했다고 한들 그게 현대 대한민국이 거기를 지배할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 동프로이센의 역사적 주인임에도 (나치 정권의 과오라는 정치적 이유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반대로 설사 고구려가 중국사라 하더라도 미래의 외교정치적 지형이 변화하면 우리가 만주를 점유하고 그 때부터 우리의 역사를 써나갈 수도 있는 것이며, 실제로 인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국가 간의 세력구도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변화하며 변화해나갈 것이다. 역사와 정치는 연관성은 있지만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결정짓는 관계는 아니다.] 다만 자칭 민족주의 사관의 후계자라는 환빠들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던 일제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여러모로 어이가 없는 상황. 해방 이후에는 정부 차원의 사료 정리가 가능해지면서 이러한 경향은 다소 완화되었으나, 일제 및 [[식민사학]]에 대한 국민적인 강한 반감과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강하게 반영된 한국의 성장 과정에서 민족주의적인 사학은 1970년대까지 한국 사학계를 주도했다. 물론 이 때까지의 사관이 현대 한국 사학의 기틀이 되어 현재에도 사학계의 큰 줄기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요서경략설]], [[자본주의 맹아론]] 등 희망적인 학설에 대해 말 그대로 희망적이기만 한 분석이 쏟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때는 북한 사학계도 민족주의적인 기풍이 강해서, [[임나일본부설]]에 반박하기 위한 일본 내 삼한 분국설, 요서 [[한사군]]설 등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영역을 외부로 확장시키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성과들은 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암암리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희망적 사관이 대중화된 것은 1980년대이나, 일반 대중 사이에 이러한 학설들은 일부만이 과장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 중 비약이 심한 것들만을 취사 선택해 버무려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환단고기]]. 여기에 증산도, 대종교 등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가 합세하기 시작했고, 연원이 고대로 올라가는 성씨 족보들의 뻥튀기도 이를 보조했다. 여기에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부터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황당한 역사관을 조장'''했다. 실제로 환빠의 조상격인 임승국이 [[10월 유신]]을 옹호한 바가 있으며, 이 시기 국회에서는 '[[국사]] [[교과서]]의 단군조선이 사실이냐 아니냐'란 주제로 청문회를 하기도 했고, [[육군사관학교]]에서도 환빠스틱한 역사관을 '일만년 새역사, 웅비하는 한민족'이라는 교재로 가르친 적이 있다. 그리고 환빠 판타지의 미래판인 <다물>이라는 책의 모티브가 된 인물 [[박창암]]은 환단고기를 발굴한 작자들 중 한 명이자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당시 [[정신세계사]]에서 출판한 김정빈의 <단(丹)>이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 소설에 담긴 환빠 역사관이 대중에 퍼져 나갔다. 단은 단군 계열의 종교인인 권태훈의 일대기를 다룬 책으로, 정말로 단학을 수련하고 단전호흡을 하면 [[도사]]나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식의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방한했던 [[초능력자]]라고 알려진 [[유리겔라]]가 TV에서 수저를 휘는 [[신통력]]을 보이자, 이런 초능력을 믿는 이들이 많아졌고, 절묘한 타이밍에 나온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환빠가 생겨난 것이다. 정신세계사는 이어 <한단고기>[* 환 桓이라고 쓰고 '한'이라고 써야한다고 우겨댄다.]와 '겨레를 밝히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역사관을 담은 유사역사서가 여러권 나왔는데, 이 책들이 많이 팔리고 널리 읽혀짐에 따라 극렬 환빠들이 생겨났다. [[이덕일]]과 [[김진명]] 같은 비전문적 역사 저술가들[* 이덕일은 전문 연구자 출신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전공한 시대 외의 영역에서도 신빙성 낮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전문적 저술가라고 볼 수 있다.]에 의해 유포되는 [[역사 왜곡|잘못된 사료 해석이나 사료 왜곡]]도 민족주의가 가질 수 있는 특유의 파시즘적 테이스트로 말미암아 사회 전반에서 초보적 환빠를 양산하는 기제가 되었다. 일부는 환빠가 생겨나게 된 것에 중국이 한몫을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환빠의 태동이 1980년대인데, 그 당시 한국에서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공"이라고 불렀고,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서 그 내부 사정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역사에 관련된 중국 당국의 정책이나 사론, 연구성과들도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중국 때문에 환빠가 생겨났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당초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패권주의적인 역사관을 시작하게 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야 1990년대 중반이며, 실제로 동북공정, 즉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고 이름을 붙인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2002년이었다. 오히려 중국이 이런 무리수를 두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환빠들이 만주지역에 가서 "조상의 고토" 운운하여 중국 측을 자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