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온 (문단 편집) ==== 제3차 북벌: 선비 [[모용부]]의 전연 공략전 ==== 동진 제7대 [[폐제(동진)|폐제]] 사마혁의 치세때인 태화 4년(369) 5월 22일, 환온은 서연이주자사 [[치음]](郗愔),[* 삼국시대 조위의 관료였던 [[치려]]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치감이었다.] 예주자사 원진(袁眞), 강주자사 환충 등과 함께 병력 50,000명을 이끌고 제3차 북벌을 감행해 선비 [[모용부]]의 [[전연]]을 공격했다. 환온은 변수(汴水)의 수로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하려고 했다. 이때 환온을 수행하던 치음의 아들 치초(郗超)가 변수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관리되지 않아 보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말렸지만 환온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하필 그때 가뭄이 들어 변수에 배를 띄우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자, 환온은 보급로를 변수에서 황하로 변경하고, [[모목지]]에게 수로를 파도록 명령했다. 치초는 황하로 수로를 뚫은 것은 물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고 또, 황하는 본진과 거리가 멀어 보급로로 적합하지 않다고 다시 한번 진언했다. 그리고 기존 작전대로 북벌을 이어갈 경우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며 두 가지 계책을 제안했다. 하나는 하북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인 업성(鄴城)으로 진격해 속전속결로 무너뜨려 전연을 요동으로 쫓아내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하의 수로를 지키며 근방에 식량을 비축해둔 뒤 내년 여름쯤에 진격을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환온은 이 제안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기어이 수로를 판 뒤 수군을 황하로 들여보냈다. 대충 보급로 문제를 해결한 환온은 우선 장수 단현(檀玄)을 보내 호륙(湖陸)을 공격해 전연군을 무찌르고 모용충(慕容忠)을 사로잡았다. 전연은 서둘러 모용려(慕容厲)에게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주어 반격을 시도했지만 황허(黃墟)에서 환온이 직접 지휘하는 동진군에게 격파당했다.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등하]]와 [[주서(동진)|주서]]가 임저에서 전연의 장수 부안(傅顏)을 격파하자, 고평태수 서번(徐翻)이 항복해왔다. 전연의 조정은 모용장(慕容臧)에게 군을 이끌고 환온을 막게 했지만 번번이 패주하는 바람에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전진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7월이 되자 전연 사람 손원(孫元)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환온에게 호응했다. 기세를 탄 환온은 어느새 수도 업성 인근인 방두(枋頭)까지 진출해 그곳에 주둔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연의 제3대 헌무제 [[모용위]]와 태부 모용평은 매우 두려워하며 요동으로 도망칠 궁리만 했다. 이때 [[모용수]]가 스스로 나서 자신이 직접 환온을 막겠다고 청하자 모용위는 이를 받아들여 모용장 대신 모용수를 총지휘관으로 삼는 한편, 전진의 세조 선소제 [[부견]]에게 무뢰 서쪽 땅을 떼어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했다. 전진의 승상 [[왕맹]]의 설득으로 부견은 구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장수 구지(苟池)와 [[등강(전진)|등강]](鄧羌)에게 20,000명을 주어 전연을 구원하도록 했다. 연전연승하던 환온군이었지만 당시 하북의 지리에 능통해 북벌군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단사(段思)가 전연의 장수 실나등(悉羅騰)에게 사로잡히면서 진격이 지체되었다. 또한, 환온의 명령을 받고 진격 중이던 이술(李述)이 실나등과 염간진(染干津)이 이끄는 전연군에게 공격받아 전사하자 환온군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모용수가 모용덕(慕容德)과 유당(劉當)에게 10,000명의 군사를 내주어 변수에서 황하로 넘어가는 수로의 석문을 점거하게 하자 환온이 원진을 보냈으나 탈환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해 이도(李邽)가 나머지 보급로들을 차단하니 환온군은 심각한 보급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만을 노린 모용수는 1,000여 명의 병사를 데리고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동진군에 돌격해 수많은 병사들을 학살했다. 전쟁이 점점 불리해지고 식량마저 다 떨어진데다가 전진의 구원병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마저 전해지자 환온은 퇴각을 결심했다. 그는 배를 모두 불태우고 치중을 버린 뒤, 모목지에게 군사를 조금 내어주어 동연(東燕)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창원(倉垣) 방면으로 후퇴시켰다. 모용수는 환온의 함정이 있을 것을 염려해 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천천히 동진군을 추격했다. 며칠 동안 추격을 한 끝에 환온에게 별다른 속셈을 없음을 간파한 모용수는 환온이 양읍(襄邑)에 이르렀을 때 공격을 가해 동진군을 또다시 대파하고 30,000명을 죽였다. 전연군의 추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동진군은 계속해서 후퇴를 강행하던 중 이번에는 전연을 구원하러 온 전진군을 만나 또 패배하고 10,000명을 잃었다. 겨우 목숨을 구한 환온은 동진에 도착한 뒤 군사를 수습하고 산양(山陽)에 주둔하며 형세를 살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지 오래였다. 무양(武陽)에서 끝까지 동진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전연군에게 저항하던 손원의 사망을 끝으로 제3차 북벌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환온은 석문을 점거하지 못한 [[원진(동음이의어)|원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이에 원진이 격노하여 [[수춘]]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환온은 전연과 전진의 지원군을 격파하고 원진의 세력을 제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