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룡사 (문단 편집) == 개요 == [[파일:황룡사지 복원도.jpg]] [[경주시]]에 있던 [[절(불교)|사찰]]로 서기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창건되었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사찰이었다. 이름이 같은 [[절(불교)|절]]이 은근히 있지만[* [[인천광역시]] [[드림파크야생화단지]] 바로 옆의 황룡사 등] 보통 '황룡사'라고 하면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에 있었던 [[신라]] 시대의 대규모 [[절(불교)|사찰]]을 가리킨다. 지금은 터만 남았기 때문에 [[문화재청]] 등에서 부르는 공식 명칭은 '''황룡사지(皇龍寺址)'''. 이렇게 터만 남은 자리를 가리키는 접미사처럼 쓰이는 '지'를 땅 지([[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터 지([[址]])이다. 한국 전근대 역사상 최대급이었던 80m[* 60m 후반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 여기에서는 80m로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0MobSmVpvTM|#]]] 가량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나 [[조선]]에 있었던 목탑들의 높이가 불확실하긴 하지만, 황룡사의 고려 버전에 해당하는 [[보제사]]의 목탑은 높이 200척(약 60m)이 넘는 5층 목탑이라 하여 황룡사 9층 목탑보다는 낮았을 것으로 보이며, [[흥왕사]]는 목탑에 비해 규모가 작은 석탑 및 금탑으로 대신했다. 황룡사 목탑은 [[고려]]시대에도 [[개경]]의 고려 정치인들의 기행문을 보면 동경([[경주시]])에 갔을 때 들러보고 높이와 전망에 감탄하는 관광명소였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숭유억불|불교를 국가 정책으로 배척했기 때문에]] 조선 이전부터 원래 있던 것 외엔 높은 목탑을 만들지 못했다. 결국 기록상으로는 황룡사 목탑 이후 대략 1300년이 지나서야 [[대한민국]]에서 [[한진]]빌딩(82m, [[1969년]])이 세워져 이 높이를 갱신했다. 황룡사는 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9층 목탑]]과 함께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황룡사에는 목탑 말고도 작은 쌍탑지가 있다. 황룡사 서편에 있는데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묻혔다. 2중기단을 갖춘 3층 석탑 2개가 존재하였고 [[구황동 제2사지]]라 불린다. 그러다 1238년 [[몽골 제국]]이 침공했을 때(제3차 [[여몽전쟁]]) 황룡사도 불탔다.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숨어 본토를 방치한 탓에 가장 후방인 [[경상도]] 지역까지 유린당했기 때문으로, 이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았다. 1963년에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했다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였을 것이다. 참고로 [[경주시]] 황용동 327번지에 있는 황룡사(黃龍寺)는 [[한자]]가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