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룡사 (문단 편집) === 황룡사 9층 목탑 === [include(틀:선덕여왕)] [[신라삼보]] 중 하나로, 대부분 황룡사하면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9층 목탑이다. 상술하였듯 주변국 구한(九韓)의 [[신라]] 침략을 막으려는 염원을 담은 탑으로 전해진다. 각 층마다 특정 주변국에 대응하는데 제1층은 [[일본]](日本, [[왜국]]), 제2층은 중화(中華, [[당나라]]), 제3층은 [[오월]](吳越, 남중국), 제4층은 탁라(托羅, [[탐라]] 오늘날의 [[제주도]]), 제5층은 응유(鷹遊, [[백제]]),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거란]]), 제8층은 여적(女狄, [[여진]]), 제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의 침략을 막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사의 수많은 건축물 중 가장 거대했고 '''세계구급'''으로도 최대 규모급을 자랑했던 전근대 시대 목조 건축물이었던만큼, 현재까지 존재했다면 마땅히 한국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 [[몽골군]]의 고려 침략 당시 몽골군들이 황룡사 9층 목탑을 원형조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하였다. [[파일:황룡사 9층 목탑 심초석.jpg]] 황룡사 9층 목탑은 한 변이 28.5미터인 기단 위에 목탑 1층 외진주열 한 변이 22.4m에 이르렀다. 약 500㎡(150평 규모)정도의 거대한 1층 바닥 면적을 봐도 압도적인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탑의 기초 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기단은 작은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붉은 색의 진흙을 다지는 식으로 2m 높이를 조성하였다. 심초석 1개와 초석 64개로 정면 7칸 측면 7칸 건물을 올렸다. 이 목탑의 높이야말로 이 황룡사 최대의 떡밥이라 이견이 분분하다. 왜냐면 [[신라]]의 길이를 재는 단위가 황룡사에 대해 기록한 시기와 황룡사 중건 당시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칸 길이로 기록된 225척을 조영(造營)[* 건물을 완공.] 당시의 길이 단위(척수)인 고(구)려척[* 동위척(東魏尺)]으로 계산하면 81m 정도가 되는데, 이는 높게 잡으면 현대식 빌딩 약 20층 높이를 넘는 셈이다. 하지만 황룡사 내부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함의 탑지(塔誌)가 기록된 당시, 즉 [[경문왕]] 재위 시기인 873년에는 [[당나라]]의 척수인 당척(唐尺)을 썼는데, 이것으로 계산하면 약 53.45m, 상륜부(上輪部)[* 피뢰침처럼 생긴 금속으로 된 장식 부분.]까지 합하면 약 66.70m 정도가 된다. [[롯데월드]] [[자이로드롭]]의 높이가 70m임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목조 건축물치고는 상당히 높다. 다시 말해 찰주본기가 조영 당시의 기록이고 이 기록이 '225척'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찰주본기는 조영보다 후대의 기록이고 이 시기에 널리 쓰인 단위는 조영 당시의 단위와 다르다. 그러므로 과연 탑의 높이를 기록 당시로부터 200년 전에 통용되던 고려척으로 기록한 것인지, 기록 당시의 당척으로 기록한 것인지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고려척 기준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찰주본기의 높이가 기록된 내용이, 중수를 다룬 부분이 아니라 건탑의 연혁을 설명하는 부분에 실려 있다는 점, 그리고 [[삼국유사]]의 기록과 찰주본기에 인용된 사중기의 내용이 동일한 점. 고로 찰주본기를 썼을 때는 ~~고려척이고 당척이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건립 초기의 225척이란 기록을 그저 베껴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양식적으로도 고려척이었을 때 탑 자체의 비례 가 잘 맞을 뿐 아니라 황룡사 가람 자체도 규칙적인 비례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수를 했어도 높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황룡사 목탑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큰 걸로만 따져도 3번 정도 새롭게 다시 세워졌다. [[삼국시대]]에 세워진 1차, 대대적인 중수로 모습이 크게 바뀌었을 2차, [[고려]]시대에 송척을 기준으로 새롭게 지어진 3차 정도인데, 중수를 거치는 와중에 기본적인 양식을 유지했을 수도 있지만 높이를 비롯하여 여러 부분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 역시 배제하지 못한다. 다만 고려 시대 송척 기준으로 세워진 3차 목탑의 경우 자잘한 중수 기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구조적으로 상당히 취약하고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양식도 상당히 변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이유인지 현대의 목탑 복원 계획에서도 고려 시대의 양식은 일찌감치 논외가 되었다. 물론 고건축에서 심초석의 주칸 길이[* 이건 고려척 기준]와 상부 건축물 높이를 서로 다른 단위로 다룬다는 건 상식 밖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높이 역시 고려척 기준의 기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긴 하다. 그러나 고려척으로 조영된 줄 알았던 건축물들이 당척으로 건립됐다는 사실로 밝혀진 다른 사례도 있어서 여러 모로 복잡한 문제. 지금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인 [[중국]] 잉셴 [[불궁사]] 5층 [[목탑]]의 높이가 67m 정도며 [[일본]] 토지의 목탑이 55m, 지금은 사라진 백제 [[미륵사]]의 목탑이 55~60m 수준, 역시 사라진 고려 최대였던 [[보제사]] 목탑이 60m 정도임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황룡사 목탑도 60m 정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청암리 사지|청암리 사지 목탑]]이 약 80m 높이로 추정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면서 신라 역시 경쟁심에 탑을 높게 건축했을 가능성이 있다. 절의 총 면적은 미륵사가 더 넓지만, 건축물의 규모에서는 여러 모로 황룡사가 미륵사보다 더 웅장했다. 유물도 보면 황룡사의 치미가 미륵사의 치미보다 훨씬 크고 고구려 정궁 치미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이례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탑이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황룡사 목탑의 높이를 81m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견이 좀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81m라고 한다. 아래 황룡사탑을 본뜬 것으로 여겨지는 부조나 청동소탑들의 비례를 생각한다면 81m가 비례에 맞기 때문이다. 제시된 여러 복원안을 봐도 60m 높이었다면 탑이 층간 높이도 납작해지고 윗층으로 갈수록 급격히 축소되어야 해서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e6dbd2dd0dc71d8858e75e65e3151de8.jpg|width=500]] 오른쪽에서 2번째 표시된 것이 황룡사 9층 목탑. 1위는 영녕사 목탑이다. 참고로 이 도표에는 당시 연구가 덜 끝났던 목탑들은 죄다 빠져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듯 [[중국]]이나 [[일본]]의 신빙성이 부족한 탑들까지[* [[목탑]] 항목에 있듯 일본에도 100m가 넘는 목탑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신빙성 논란 때문인지 일단은 빠져있다.] 모두 사실로 친다면, 황룡사 9층 목탑이 전근대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목탑이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위 사진의 1번 [[중국]] [[뤄양]]의 [[영녕사]] 목탑은 타워 크레인도 철근 콘크리트 공법도 없는 전근대의 건축기술 수준으론 건설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규모임에도 남은 터는 황룡사 9층 목탑보다 작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516년 지어 20년도 안된 534년에 화재로 소멸되고 말아서 더 의구심이 남는 대목. 하여튼 기록과 유구가 확실하고 구조상 논란의 여지가 없이 목탑인 것으로 한정한다면 황룡사 목탑이 전근대 역사상 최대 높이의 목탑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 역시 현재는 소실되어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긴 하다만. 기타 자세한 내용은 [[목탑]]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참고로 간혹 이런 거대한 규모 때문에 현대 기술로는 복원도 불가능한 오버 테크놀러지인 것처럼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하지 않는 이유는 고증문제와 예산문제 같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서 지지부진한 것일 뿐 81m짜리 목조 불탑을 만드는 것은 현대기술로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