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룡사 (문단 편집) === 칠처가람지허 === 13세기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 흥법 편에서 다른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시대 [[서라벌]]에 있었던 이른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요약하면 [[석가모니]]와 이전 시대의 부처들([[과거칠불]]) 시대에 이미 [[신라]] 땅에는 [[불교]]가 들어와 창건된 절 7곳의 터(칠처가람지허)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것은 신라인들에게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후손들이 잠시 잊었을 뿐) 까마득한 옛날부터 믿어온 유서 깊은 종교라고 주장하는 전설이다. [[삼국유사]]에서 설명한 칠처가람지허는 다음과 같다. *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 [[흥륜사]](興輪寺) * 삼천기(三川歧): 영흥사(永興寺) * 용궁(龍宮) 남쪽: 황룡사(皇龍寺) * 용궁 북쪽: [[분황사]](芬皇寺) * 사천미(沙川尾): 영묘사(靈妙寺) * 신유림(神遊林): [[경주 사천왕사지|사천왕사]](四天王寺) * 서청전(婿請田): 담엄사(曇嚴寺) 이중 사찰이 그대로 내려오는 곳은 하나도 없다. 분황사가 [[조선]]시대에 건설되었을 따름이다. 일제시대 조사로 흥륜사 터라고 알려진 곳에 1980년대에 다시 절을 지었는데, 그 자리에서 '영묘사'란 글귀가 새겨진 유물이 출토되었기에 오히려 학자들은 영묘사 터가 아닌가 추측한다. 그리고 이외의 절터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자리만 남았거나 심지어 대충 추정만 하기도 한다. '칠처가람지허'라고 기록한 곳들은 전부 [[불교]] 도입 이전 신라에서 신성하게 여겨 [[제사]]를 지내던 자리였던 듯하다. 즉 신라 전통종교의 성지를 불교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종교의 성소에 새로운 외래종교의 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난 곳이 바로 황룡사와 [[분황사]]이다. 사실 황룡사와 분황사는 남북으로 거의 연달아 있다고 해도 될 만큼 거리가 가깝다. 그런데 황룡사는 용궁의 남쪽, 분황사는 용궁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용궁은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있어야 한다. 오늘날 황룡사지의 북쪽에 가면 작은 신라시대 [[우물]]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용궁'이라고 추정한다. 옛날 [[신라]] 사람들은 그곳에 [[용]]이 산다고 믿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아래에서 설명할, [[진흥왕]]이 궁궐을 지으려는데 용이 나타나서 절을 지었다는 전설도 아마 여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라인들이 우물에 제사를 지내던 것은 이외에도 많은 케이스가 전해 내려오는데, 개중에는 [[인신공양]]을 한 흔적도 있다. 고대 [[일본]]에는 이 우물 제사의 풍습이 전해져서 사람 대신 [[인형]]을 공양한 제사를 지낸 흔적이 남아있다. 신라도 통일 이후에는 인형을 공양했는데, 신라 말기 사회가 혼란해지며 인신공양 풍습이 다시 부활한 것으로 학계는 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