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룡사 (문단 편집) === 황룡사가 다시 중건되지 못한 이유 === 원래 목조 건축은 불타버렸으면 다시 짓는 경우가 많다.[* 목재건물인 조선왕조의 경복궁도 현재 복원 중이긴 하다.] 대표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근성]]을 느끼게 하는 [[백담사]]도 불타면 다시 짓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동아시아]] 고건축물들은 목재로 짓는다는 특징과 변변한 화재진압기구가 없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전쟁이 많았던 고대국가에는 이게 특히 심했다.[* 침략군이 지나가면서 일부러 불을 지른다. 이렇게 하면 영토를 확장했을때 자신들도 사용을 못하고 민심도 안좋아지겠지만 적이 탈환해도 사용을 못 하고 적이 전쟁보다 복구에 예산을 쓰기에 특히 의식주 같은 곳 이므로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줄 수 있고 다시 침략하는데 유리하다.] 또한 아무래도 목조 건축이기에 비같은 물에도 취약해서 오래 보존되긴 어렵다. 그래서 고대 국가의 궁궐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 목조 건축이라 현대에는 터만 남았다.[* 예컨대 조선의 5대 궁궐([[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조차도 지금 온전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경희궁은 거의 해체된 상태다.] 고대 중세에는 [[피뢰침]]이 없었고, 피뢰침이 발명되려면 [[18세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그 이전의 건축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지대에 위치했거나, [[성당]]과 같은 거대한 [[건물]]일 경우 벼락을 맞고 불타거나 훼손되기 일쑤였다.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도 낙뢰로 화재가 일어나 통째로 소실된 적이 있었다. [[호류지]], [[도지]] 등 고대시대 목탑이 많이 남은 [[일본]]도 여러 차례 중건한 사례가 많다. 황룡사 목탑의 높이는 약 80m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당연히 벼락의 위험에 쉽게 노출됐을 것이다. 만약 황룡사 목탑을 언젠가 다시 세운다면 피뢰침뿐만 아니라 [[항공법]]에 따라 [[항공장애등]]도 탑 끝부분 첨탑과 중간지점인 40m 지점에 설치해야 한다. 이처럼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거대함 때문에 갖은 수난을 당했고, 결국 여러 번 다시 지어야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14년(674)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금당)을 무너뜨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목탑의 수난사를 자세하게 적는다면, 처음 지어진 이후 53년째 되던 해, 즉 [[효소왕]] 6년(698)에 벼락에 맞았지만 피해는 미약했고, [[성덕왕]] 17년(718)엔 지진으로 비가 샐 정도로 피해가 생겨 1년 반 정도 보수공사를 했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나면서 [[문성왕]](839~856) 대에 동북쪽으로 탑이 심하게 기운 상태에서 [[경문왕]] 8년(868)에 벼락을 맞아 다시 보수공사를 했다. 그로부터 다시 82년이 지난 [[광종(고려)|고려 광종]] 5년(954)엔 벼락으로 목탑 자체가 소멸, 결국 신라 창건기의 목탑은 지어진 지 300년을 좀 넘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후 [[여요전쟁]]도 있고 해서 바로 복구되지는 못했고, 60여 년이 지나 [[현종(고려)|고려 현종]] 3년(1012)에 다시 재건을 시작했다. 이 목탑을 재건하기 위해서 경주에 있던 이궁인, [[조유궁]]을 전부 헐어서 지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져 있다. 현종의 할머니가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 [[신성왕후]] 김씨로, 현종 본인이 고려 왕실과 신라 왕실의 혈통을 모두 받았다는 사실이 재건 결정에 영향을 준 듯하다. 이 공사는 9년 만에 완료했고 이후에도 [[정종(고려 10대)|정종]] 2년(1035), [[헌종(고려)|헌종]] 1년(1095)에 보수공사를 했다. 마지막 보수공사가 끝난 지 142년 후 [[고종(고려)|고종]] 25년(1238) 몽골의 3차 침입으로 최종적으로 소실되어 그 후엔 다시 재건되지 못했다. 황룡사 목탑에 보관되었던 찰주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9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큰 보수공사가 이루어 진 것만 따져도 5번이나 되고, 한 번 소실되어 다시 재건된 경우도 있으니 시간과 재력 그리고 의지만 있다면 다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여몽전쟁]] 후 [[원간섭기|원나라의 간섭]]을 받았고, 그리고 대대적인 [[왜구]] 침입으로 인한 혼란스런 시대상황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불탔어도 미처 재건을 못하던 시기였다. 하물며 고려 건국 후 과거의 영화를 잃고 쇠락한 지방 도시였을 뿐인 경주의 큰 사찰을 복원할 여지는 없었다. 거기에 신라 때부터 [[왜구]]가 창궐하던 경주 인근은 고려말 왜구의 준동에 쉽게 노출되기 쉬운 지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어서 [[유교]]적 왕도정치를 내걸고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불교]] 자체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 건축의 큰 방향 역시 실용적이고 검소한 분위기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러한 거대한 불교 건축물의 중건을 국가적인 역사로 삼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고려]]시대를 잘 넘긴 타 지방의 다른 규모가 큰 사찰들도 조선시대 500년을 거치며 하나하나 사라지거나 크게 축소되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던 남아있는 거대 사찰들 역시 유지되고 재건될 수는 없었다. 근성의 [[백담사]]는 산중에 있는 중소사찰이었기에 명맥울 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형사찰들은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명맥이 끊어진다. * [[흥왕사]]: 한국 역사상 면적이 가장 넓었던 사찰인 [[흥왕사]]는 건물의 규모는 2800칸 수준이었으며, 면적은 너비 800 m, 길이 400 m로 32만 ㎡에 이르렀는데, 이는 고려 정궁인 [[만월대]] 본궐의 1.25배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이다. (참고로 후원 부분을 제외한 고종 시기 경복궁 면적에는 70% 크기). 크기도 크기지만, 화려하기도 해서 경내에는 은 427근으로 안을, 금 144근으로 겉을 장식한 매우 화려한 금탑이 있었다. * [[보제사]]: [[개성시|개경]]에 장대한 5층 목탑을 가지고 있었던 광통 [[보제사]] [[개성시|개경]] 도심 한복판에 있었던 거찰로서 규모가 장대해서 건물만도 1천여 채에 연못이 2개, 우물이 9개나 있었다. 5층 목탑의 높이는 60 m 남짓이었다. * [[회암사]]: 조선왕사라고도 불렸던 [[회암사]] 같은 다른 거대사찰들은 모두 조선 중기를 기점으로 파괴된 후 명맥이 끊겨버렸다. 회암사는 [[불교]]를 숭상했던 [[문정왕후]]가 비호하여 일시적으로 번창되었지만, 그녀의 사후 유생들이 파괴해버렸다. 이중 회암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태조 [[이성계]]의 비호 아래 [[무학대사]]가 거주했고 후에 태조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난 이후 말년에 기거해서 사실상 왕실원찰이었으며, 오히려 조선 건국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유생들의 방화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 [[불국사]]: 황룡사와 같이 경주에 있는 [[불국사]]도 규모 면에서는 황룡사에 빗댈 수 없는 중형 사찰이지만 신라 창건기의 규모에서 점점 줄어들다 조선 후기에는 폐사 일보 직전까지 갔다. 이 때 무너지기 직전과 같은 모습이 구한말 흑백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때문에 황룡사가 계속 남아있었다 한들, 이 시점에서 퇴락한 지방의 일개 거찰에 불과한 황룡사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존재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 현대에 와서 중건했다 하더라도 [[대한불교조계종]]이 중건할 경우 [[불국사]] 혹은 [[통도사]]의 말사, 혹은 다른 종단 주도하에 새로 창건하는 수준으로 중건, 중건된 사찰의 기능도 사회복지 및 청년불자 교육 집중 등의 과거 황룡사와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하는 사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1세기나 22세기에 와서 중건될 경우, 아무래도 현 황룡사지는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어 황룡사지에 중건하는게 불가능하므로, 아예 경주 시내의 다른 곳으로 가고, 도심 포교 등을 명목으로 현대식 빌딩 등에 입주하는 식으로 중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현대식 빌딩 등에 입주하는 조건으로 종단의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중건할 수 있는 상태이긴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