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룡사 (문단 편집) === 황룡사지의 정리와 도굴 === 황룡사가 있었던 터인 황룡사지는 폐사 이후 거의 천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폐허가 되어, 민가 약 100여 동이 조성되었다. [[https://youtu.be/JnNYgx3S73E|100여 년 전 황룡사의 모습을 담은 유리건판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는 [[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전국에 있는 한국 유적을 답사했는데, 1930년에는 황룡사를 조사한 뒤 가람 배치를 1탑 1금당식이라고 잘못 추정하였다. 황룡사가 [[백제]]의 아비지가 건설에 참여한 백제 양식의 사찰로 보고는 [[호류사]], [[시텐노지]]처럼 [[일본]]에 남아있는 백제계 사찰의 가람배치를 따라 1탑 1금당식이라고 속단한 듯하다. [[광복]] 이후 다시 시간이 흘러 [[1960년대]] 초, 한국 고고학자들은 황룡사 터에 민가가 들어서고 주민들이 밭을 일구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이를 걱정하여 정부에 대책을 촉구했다. 그리하여 정부는 민가들을 매입하여 모두 헐어내었다. 이 때문에 황룡사 목탑지 한가운데 있던 거대한 심초석[* 건물의 중심 기둥(심주)을 받치던 돌]과 그 위를 넢은 큰 장방형 뚜껑돌이 드러났다. 민가가 있던 시절에는 심초석과 뚜껑돌이 담장의 일부분이었는데 이것이 다 나온 것. 민가 철거야 좋았지만, 이는 [[도굴꾼]]들이 작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없어진 것과도 같았다. 그동안은 주민들이 있으니 몰래 작업을 할 수 없었지만, 이젠 목격자가 될 사람이 없는 텅 빈 벌판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탑]]이라면 [[부처(불교)|부처]]의 [[사리(불교)|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 부처의 [[사리(불교)|사리]]를 보관하는 사리함을 포함한 유물군]가 있어야 한다. 하물며 신라 제1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9층 탑이라면? 도굴꾼들은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도 전에 심초석의 뚜껑돌을 들어올리고는 심초석 내 사리공에 있는 사리장엄구 일체를 훔쳐갔다. 학자들 입장에선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게 된 격. 30톤짜리 장방형 심초석 뚜껑돌을 기계 정비에 쓰이는 잭으로 살짝 들어 가져갔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 왕께서 찰주에 본래 봉안한 사리가 어떠한지 염려하여 이간인 승지(承旨)에게 임진년(872) 11월 6일에 여러 신하를 이끌고 가보도록 하였다. 기둥을 들게 하고 보았더니 주초(柱礎)의 구덩이 안에 [[금]]과 [[은]]으로 만든 고좌(高座)가 있고 그 위에 사리가 든 유리병을 봉안해 두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탑이 있었을 텐데 심초석 안을 들여다보았다니, 심주를 옮기는 방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4년 도난 사건 직후 [[황수영]] 교수는 당시 유명하던 골동품업자에게 어떤 사리구 감정을 의뢰받았는데, 그것이 아마도 도굴된 황룡사의 바로 그 사리구였으리라 회고하였다. 이후 황룡사 목탑의 사리구는 영영 못 찾는 줄 알았다. 그런데 2년이 지나 1966년 9월, 그 도굴꾼들이 [[불국사]] [[석가탑]]도 털다가 미수로 그치고 붙잡혔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직 수위가 있었다. 경찰이 여죄를 추궁하던 중에 황룡사도 털었다는 정황을 알아내어 황룡사 사리구를 회수하였다. 이 사건에는 [[재벌]]도 연루되었다고 한다. [[금림왕|가야금관 도굴 사주 의혹]]이 있던 재벌이고, 고미술품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려놓은 [[삼성그룹|대한민국 원톱 재벌]]이란 소문. 실제로 창업주 [[이병철]]의 형이 석가탑을 털려다 실패한 도굴단으로부터 도굴한 장물을 취득한 혐의로 구속된 전과가 있었다. 다만 되찾은 것은 사리구 중 사리와 사리함을 제외한 사리장엄구로, 사리와 사리함은 지금도 존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리장엄구과 그 안의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아무튼 사리구 중에는 작은 사리 그릇과 네모난 청동 소함이 있었고, 사면으로 이루어진 사리 외함, 내함이 있었다. 금제합, 명문판 [[염주]], 청동방함, 은합 등. 그러나 끝내 사리병과 사리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사리 그릇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청동 소함이 감싸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금동팔각사리탑도 사리구 안에 함께 있었다. 특히 사리 내함은 부식이 심해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지만, 기록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황룡사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사리 내함의 3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의 중건과 수리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를 적었는데, 바로 여기에 9층 목탑의 높이와 수리 내력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http://younghwan12.tistory.com/3414|찰주본기]] >9층탑은 절반 이상의 높이가 7보(42자), 그 이하가 30보 3자(183자)이다. 총 225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