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병서 (문단 편집) === 급부상 ===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언제 대장으로 승진했는지, 4월 15일에 열린 비행사대회에서 대장 계급장을 달고 나타났으며, 4월 26일, 당중앙위원회, 국방위원회 공동결정에 따라 [[조선인민군 차수]]로 승진하는 등 초고속 승진을 거쳤고, 5월 2일 북한군 [[제복군인]] 서열 1위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됐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889335|기사]]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김정은 치세 초기를 상징하는 최고 실세 중 한 사람으로 자리잡았다. 이 시점에서 정치국 위원에도 이미 보선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땐 김정은이 조직문제 결과를 잘 보도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확인할 순 없다. 최룡해가 총정치국장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 자리를 꿰어찼으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도 보선되었다. 특히 [[김정은]]은 --이미 죽여 없앤-- [[장성택]]을 대신하여 최룡해를 견제하기 위해 황병서를 발탁하고 중용했다는 분석이 제기됐었다. 황병서가 [[고용희]]의 총애를 받아서 김씨 일가와 친분이 깊다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도 있었다. 2014년 7월, [[전병호(1926)|전병호]]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4년 7월 27일 한국전쟁 종전기념일 행사에서 [[조선인민군]] 최선임 제복군인 자격으로 단상에 올라 "전략핵무기로 미국 [[백악관]]을 타격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으며 --개소리전문가-- 2014년 9월 25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13기 2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6094554|선출되었다]]. 2014년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최룡해]], [[김양건]]과 함께 전격적으로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 방문하였다. [[최룡해]], [[김양건]]과 달리 국가체육지도위원회에 연관된 인사가 아니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그의 직책과 대동한 [[호위사령부]] 소속 경호원들, 그리고 타고 온 비행기가 [[김정은 전용기]]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김정은의 특사라고 할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생애 처음으로 [[방남]][*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의하면 북한 지역도 대한민국의 영토다. 따라서 대한민국 헌법상 북측 인사의 남쪽 방문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의 이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방한이 아니라 방남이 대한민국 헌법에 부합하는 표현이고, 한국 언론도 방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 집 작은 방에서 우리 집 큰 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두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고 하질 않는 것과 같다. 자세한 설명은 [[방남]] 문서를 참조.]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동행한 최룡해, 김양건이 그에게 깍듯하게 대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북한의 최고 실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회동이 이루어질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일정을 이유로 청와대 예방은 하지 못했다.[[http://media.daum.net/issue/724/newsview?issueId=724&newsid=20141004205706156|참고기사]] 오찬회담[* 인천시청 인근의 '영빈관'이라는 한정식집에서 이뤄졌으나, 해당 한정식집은 2016년말 폐업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도심형 오피스텔 건물이 들어서 있다.]에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류길재]] 통일부장관을 만났으며, 폐회식 전과 마치고 난 후에 [[정홍원]] [[국무총리]]를 면담하였다. 또한 수많은 언론들이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친서는 없었고,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정홍원 국무총리를 통해 김정은의 메시지만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2월 1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최룡해가 정치국 위원으로 강등당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2015년 4월 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대 22주년 중앙보고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직함으로 등장하면서 상무위원 승진이 확인되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7516621|#]] 2015년 5월에는 숙청되었다는 설이 돌았으나 이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된 것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숙청되지 않았다고 국정원이 전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709352|#]] 현영철 숙청에 황병서가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전군인 출신인 현영철은 정치군인 출신인 황병서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결국 권력다툼에서 현영철이 패배하고 처형당했다는 것.[[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543|#]] 2015년 8월 22일 [[서부전선 포격 사건]]으로 촉발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이 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북한 대표 두명중 한명으로 나오기로 하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김양건]] 당비서. 원래 북한은 김양건만 보내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황병서를 보낼것을 요구했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였다. 8월 22일부터 8월 25일까지 진행된 회의에서 김관진이 1940년생이라고 들었는데 맞냐고 묻자 그렇다고 긍정했으며 자기가 연장자란 이유로 은근슬쩍 말을 놓기도 했다고 하며 딱딱한 김양건과 달리 회담 분위기를 잘 이끌었다고 전해졌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827005043|서울신문 보도]] 회의가 평행선을 달리자 김관진을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자신의 전투복 상의를 벗어서 자신에게 척추질환이 있음을 호소하면서 "김 선생, 나 좀 살려주시오."라고까지 하면서 저자세로 협상 타결을 촉구했다고 한다. 이에 김관진은 "황 선생, 좋은 날 오면 내 좋은 병원 소개해드리리다. 그래도 협상은 양보할 수 없소. 북한이 잘못한 것 아니오."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015년 11월에 [[서부전선 포격도발]] 수습하고 대북 확성기방송을 중단시킨 공로로 김양건과 함께 북한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훈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정작 김양건이 죽었을때 북한은 김양건이 공화국영웅이라고 발표하지 않았던 걸 보면 오보로 보인다.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리을설]] 인민군 원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2015년 12월초 [[싱가포르]]에서 척추수술을 받았다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가 나왔다. [[김양건]]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김양건 장의위원에도 위촉되었다. 2016년 5월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직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최고 실세임을 과시했으며 2016년 6월,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새롭게 신설된 국가최고기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국무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군을 대표해 임명되었다. 2016년 5월, [[강석주(1939)|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7년까지 김정은을 적극 보좌하면서 매우 부지런하게 행사를 다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