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병학 (문단 편집) === 이후의 독립운동 ===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때까지 신분을 숨긴 채 은거하던 황병학은 만주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심하고 최춘명(崔春鳴) 외 2명으로부터 350원의 여비를 제공받아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만주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영고탑, 용정촌, 압록강 연변 및 홍개빈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여러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렀다. 그러던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라는 밀명을 받은 그는 전라도에 잠입하여 고흥에서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전라도의 우국지사들을 만나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 뒤 함께 평안도까지 올라갔다가 기산도가 체포되었지만, 그는 무사히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에게 군자금을 전달했다. 1923년 봄, 황병학은 다시 임시정부의 특명을 받들어 조선에 잠입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그의 움직임을 간파한 일본 경찰에 의해 신의주에서 체포되었고, 평양 형무소에서 4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진 취조와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31년 4월 23일에 사망했다. 향년 56세. 그의 유해는 진상면 비촌리에 매장되었다가 1977년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창원 황씨]][[분류:광양시 출신 인물]][[분류:1876년 출생]][[분류:193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