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사영 (문단 편집) == 생애(백서 사건 이전) == 황사영은 1775년 [[한성부]] 서부 반송방(성외) 아현계 아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경기도]] [[강화군|강화유수부]] 장령면 고월동(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65-1번지)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는데, 이 곳은 현재도 [[황(성씨)|창원 황씨]] 집성촌이다.[[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Num=2272|#]]]에서 정8품 휘릉별검(徽陵別檢)을 지낸 황석범(黃錫範)의 유복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1790년([[정조(조선)|정조]] 14)에 증광시 진사시에 3등 8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90_026530|입격했다]]. 천주교 교육 만화에 따르면 이 때 정조가 친히 두 손으로 황사영의 오른손을 꼬옥 쥐고 격려를 했는데, 본인은 이를 큰 영광으로 여겨 오른손에 비단을 감고 평생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후술하는 체포되는 순간까지도.[* 다만 이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애초에 진사시는 [[과거]] 중에서도 지역에서 보는 최초의 시험인 소과로, 임금 앞에서 보는 대과 전시도 아닐 뿐더러 당시 황사영의 합격 등수는 3등의 83위로 고작 '''126명 중 113등'''에 불과했다. 좋게 보면 [[위인전]]에서 흔한 과장인데, 이 내용을 [[김훈(소설가)|김훈]]의 소설인 <흑산>에서도 사실인 것처럼 반영했다. 다만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합격했다는 점과 정조가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예뻐했던 [[정약용]]의 조카사위라는 점에서 정조가 기대를 걸고 따로 불러 격려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진사가 된 것 자체로도 어쨌든 지방에서는 큰소리 칠 만큼 대단해진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실록을 보면 [[정조(조선)|정조]]는 열렬한 [[성리학]] 중심주의자였고, [[천주교]]에 대해 금지의 입장을 분명히 했으며, 정학(성리학)을 바로 세움으로써 사학(천주교)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 임금 및 실권자들과 방식이 다를 뿐, 천주교에 대해 선은 확실히 그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정약용]]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 마리아[*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72663.html|정난주]]라고도 한다. 남편이 처형되자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인 황경한(당시 2살)은 [[추자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자라났다. 제주시 외도동에 정난주 마리아의 이름을 딴 '정난주성당'이 있다.]와 혼인했으며, 셋째 처숙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되었다. 자세한 것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항목을 참조.]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