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대첩 (문단 편집) === 전라도로 이동한 왜구 ===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남원으로 이동하고 있을 무렵, 당시의 왜구는 상술했듯 그 기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을 완벽하게 때려눕힌 왜구들은 남하하는 대신 팔량치(八良峙)를 건너 이번에는 전라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주, 합포, 울주 등 왜구의 침입이 자주 있었던 경남 지역에서 상당수의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의견대로라면 왜구는 고려군의 포위망에 토끼몰이 당한 셈이 되는데, 이런 주장에서는 사근내역 전투가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되기도 한다. 즉, 사근내역 전투는 9명의 원수과 모여 일대 대결전을 치르고 패배한 전투가 아니라, 고려군이 왜구를 여기저기서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추격하는 도중에 왜구가 배언과 박수경의 부대를 격파하고 남원 쪽으로 도주한 전투라는 이야기. 사근내역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특별히 여타 지휘관들이 처벌 받은 정황이 없기에 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면 왜구는 위풍당하게 전라도로 이동한 것이 아닌 경상도로 도주하지 못해 전라도로 피한 것이다.[* 고려 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전략적으로 왜구들은 진포해전 때문에 고려에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경상도 해안 지대를 훑고 규슈로부터 지원군을 받아 귀환하는 것이 최선의 진로였을 텐데 굳이 방향을 꺾어 멀리 전라도로 향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지다. 설령 사근내역 전투에서 대결전을 벌여서 승리했다쳐도 언제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할지 모르는 이상 전라도로 향해 고립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래에서 서술하듯 왜구들이 북으로 치고 올라가겠다고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허장성세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는 경상도를 통해서 일본으로 귀환하려다가 사근내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한번 해볼만한데 이 기회에 아예 고려라는 나라를 접수해봐? 하고 방향을 틀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다만 여기까지 이르면 사료로는 더 확증할 수 없는 추론의 영역이기에 뭐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어찌되었건 확실한 것은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했으며, 왜구는 더 이상 경상도로 움직이지 않고, 전라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fe85c82adab7aad82de211255042d01ef43eaf4e73594cb2c15602f625943d30.png|width=400&align=right]]이후 왜구는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까지 이동했으며, 여기서 남원산성(南原山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남원산성은 왜구의 매세운 공격을 어찌어찌 막아내었다.[* 남원은 전형적인 분지로 성을 쌓지 않아도 지형 자체가 요새의 기능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 시킨후 5소경을 세웠던 곳중 하나가 남원이다] 1378년 고려 조정은 각 도에 사자를 보내 산성의 수축을 명령한 적이 있었는데,[* 『고려사절요』 권31, 우왕 6년 7월조] 왜구의 침범이 특히 잦은 남해안 지역의 산성들은 그 시기를 기점으로 수비가 강화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어찌 되었건 요지에 자리 잡은 남원산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쉽지 않자 왜구는 일단 물러났는데, 대신 운봉현(雲峰縣)을 불태워버리고 인월역(引月驛)에 자리를 잡았다. 인월역의 남쪽은 험준한 [[지리산]]의 기슭에 임하고 서북쪽에는 황산이, 동북쪽에는 성산이 있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방어하기에 쉽고, 역으로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았다.[* 홍산·진포·황산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 이영][* 실제 이성계에게 여러 장수들이 "왜적이 공격하기 어려운 곳에 들어섰다." 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왜구는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다.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 [[담양]]이다.]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 조선 세조 때에 편찬된 [[역대병요]]라는 책에 나오는 기술이다.] 북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은 수도 개경을 공격하겠다는 소리였다. 이 말에 수도와 지방이 모두 패닉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고려군의 주력이 북쪽에 수비진을 만들면 그 사이에 왜구가 남쪽 해안가로 나가 바다로 다시 나가려는 의도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하간 저런 망발을 당당하게 할 수 있고 고려 조정이 이를 그저 [[개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왜구의 기세를 짐작케 한다. 이성계가 남원에 도착했을 때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고려군이 패배한다면 왜구가 전력을 보존하여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수도 개경마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