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대첩 (문단 편집) === 일대 결전 === || [[파일:external/oi68.tinypic.com/9zni40.jpg|width=720]][br]'''고려 말 왜구 토벌의 전략과 전술 : 사근내역 전투와 황산 전투를 중심으로 中 ─ 이상훈, 군사연구 134호''' || 지원군으로 도착한 다음날 아침 바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이성계는 높이 477미터의 여원치(女院峙) 고개를 넘어 운봉(雲峰)에 이르렀고, 운봉 분지를 지나 황산 서북쪽에 도달하여 정산봉(鼎山峰)에 올라 적진을 살폈다. 이 시점에서 이성계와 일본군의 거리는 불과 수십 리 정도의 거리였다. >"적군은 반드시 이 길로 나와서 우리의 후면(後面)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마땅히 빨리 가야 되겠다." 적진을 살피고 계획을 세운 이성계는 그렇게 말하며 정산봉 오른쪽의 작은 길로는 자신이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고, 대신 나머지 부대는 평탄한 길로 나아가게 했다. "후면을 공격할 것이다." 는 이성계의 언급을 보았을 때, 이는 고려군이 평탄한 길로 나아갔을 때 왜구가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공격하려고 하는 점을 예측하고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정산봉은 황산의 한 줄기로 황산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성계가 나아간 정산봉 오른쪽의 길은 고려군을 기준으로 볼 때 황산의 동쪽 자락에서 동북으로 난 길로 추정되며, 평탄한 길은 정산봉 오른쪽의 동무와 서무로 이어지는 길로 추정된다. 동무와 서무 방향으로 나아간 고려군의 여타 병력은 조금 전진을 하다가 강력한 적군의 기세를 보고는 무리하지 않고 우선 물러났다. 그 무렵, 왜구들은 반대편의 길을 통해 재빠른 기병 등을 동원해 고려군의 뒤를 잡으려고 움직였다. 그러나 이는 이성계의 예측대로였기 때문에, 왜구의 기병들은 고려군의 뒤를 치지 못하고 그 길로 오고 있던 이성계와 교전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군의 병력은 둘로 나뉘었는데 이성계가 자신의 [[가별초|친병]]을 다른 장수에게 맡길 리가 없으니 이 당시 왜구 기병과 교전했던 고려군은 이성계의 친병 위주라 여겨진다. 이성계가 [[여진족]] 사이에 영향력이 막대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실제로 여진족이 포함된 기병을 동원했던 사례로 추측이 되는 만큼[* 조선 왕조 실록 태조 1권 총서 76번째 기사에는 황산대첩은 아니지만 여진족이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있다. 왜구와 전투에서 이미 승기를 잡아 승세가 아군 측으로 기울었는데,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이성계가 적이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한 기록이다. 다만 보병인지 기병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싸움은 '''고려,여진 기병 VS 왜구 기병'''이라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활]]을 잡고 대우전(大羽箭)과 유엽전(柳葉箭) 수십 발을 쏘아대며 왜구를 죽였다. 이렇게 벌어진 난전은 3차례를 이어졌는데, 나중에 이르러서는 진흙탕에서 교전을 벌일 정도였다. 좁은 오솔길에는 크게 교전을 벌일 만한 뻘판은 없으므로,3번의 교전이 진행되는 동안 이성계가 적을 점점 평탄지로 유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서 평탄한 길로 나서다가 회군한 고려군이 합세하여 같이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고려군의 뒤를 치려던 왜구를 오히려 고려군이 협공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난전을 벌이며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싸우다가 어느 정도 적을 물리치고 보니, 대부분의 사상자는 왜구들이었고 고려군은 의외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앞서 평탄한 길로 가던 고려군이 회군하던 무렵에 해가 기울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보면 이 싸움은 저녁까지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등에서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 소탕해 버렸다."는 식으로 전투가 단 하루만에 끝났다고 되어 있는데 여러 정황을 보면 이는 실제하고는 좀 다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산대첩비 자체가 후대에 세워진 일이니 고증은 좀 맞지 않을 수 있다. 전투를 정확히 기록하기보다는 태조의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 주 목적이기도 하고.] 이후에 이성계가 하늘의 해를 가리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진 해를 가리킬 순 없으니 전투가 이틀에 걸쳐 벌어진 것은 확실하다. 관련 기록에서는 특별히 날짜의 변경을 가리키는 기록은 없으나 저 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날짜 변화를 알 수 있다. 첫째날에 벌어진 싸움에서 고려군은 왜구의 기병을 되려 역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렇게 되자 다음날 왜구는 험준한 위치를 살려 굳게 버티고만 있으면서 싸우려고 하질 않았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왜구는 고려군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참 공격하기 뭐한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oi65.tinypic.com/2a76ag5.jpg|width=300&align=left]] [clearfix] 당시 왜구를 이끌던 대장은 [[아기발도]](阿其拔都)라는 자였다. 아기발도는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나 용맹하고 날랬다. 아기발도는 처음에는 고려로 오지 않으려고 했으나 워낙 용맹해서 왜구들이 청하여 대장으로 모시고 왔다. 왜구 두목들이 아기발도에게 무릎을 꿇었고, 아기발도가 군령을 주관하고 있었다. 아기발도는 이성계의 포진을 보자 '''"저 장수는 지금까지 봐온 장수들과는 다르니 단단히 준비하라. 오늘 전투는 너희들 마땅히 각기 조심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고려군에게 잡힌 포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성계가 거느리고 있던 친병들은 보통 전투력이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거의 모든 전투세력과 싸웠던 경험을 지닌 [[가별초]]였으니 여타 고려군과 다른 면모가 보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자 이성계는 일단 요해지에 군대를 배치한 후, 적을 끌어내기 위해 휘하의 이대중(李大中) 및 10여 명을 시켜 싸움을 걸었다.[* 고려사절요에는 이대중 및 10명 정도로 언급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된다. 이대중 외에 우신충(禹臣忠)·이득환(李得桓)·이천기(李天奇)·원영수(元英守)·오일(吳一)·서언(徐彦)·진중기(陳中奇)·서금광(徐金光)·주원의(周元義)·윤상준(尹尙俊)·안승준(安升俊) 등이다.] 그렇지만 이후 기록에서 적이 계속 위에서 내려치는 포지션에 있는 것으로 봐서는 별 소득이 없었던 모양.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직접 적을 보며 군대를 동원해 아래서부터 쳐올리게 했지만, 왜구들도 자신들이 현재의 지리적 이점을 잃어버리면 꼼짝없이 죽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 도저히 쉽지가 않았다. 왜구들이 위치한 곳은 야트마한 야산이 아니라 관악산보다도 더 높았다. 그런 곳에서 왜구도 죽을힘을 다해(死力) 버티며 위에서 공격을 퍼부어대니 고려군도 당해 낼 방법이 없었던 것. 이렇게 되자 고려군은 교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이성계는 그 모습을 보고 여타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을 넘어지지 못하게 하라." 이런 말까지 할 정도면 꽤나 지리적 여건이 불리했던 모양.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본 이성계는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다. 나팔을 불어 군대를 정돈시킨 이성계는 재차 적진과 부딪혔다. 고려군은 마치 개미가 절벽에 붙어 가듯 어렵게 어렵게 공격을 했는데, 이성계 역시 이 전투에서 직접 나섰다. 그런데 한참 그렇게 험지에서 난전이 벌어지던 중에, 왜구의 장수 한 명이 창을 들고 이성계에게 다가가고 있자 [[이지란]]은 깜짝 놀라 이성계에게 소리쳤다. || [[파일:external/chonghae.byus.net/chonghae.gif|width=170]][br]'''[[이지란]](李之蘭)''' ||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기록에서는 令公視後 라는 말을 연달아 두 번을 하는 것으로 쓰여져 있는데, 당시의 급박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또한 이를 통해 이지란은 이성계와 떨어져서 따로 자기 휘하 친병들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마침 왜장을 발견해 직접 도우러 가기에는 여의치 않아 급히 외쳐서 알려줬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옆에서 싸웠다면 굳이 알려주기보다 직접 왜장을 처리했거나 최악에 경우 이지란 역시 왜장을 보지 못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참 난전 중인 이성계는 전장의 소음 때문에 이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러자 이지란은 '''직접 활을 쏘아 그 장수를 죽였다.'''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도 알지 못했을 정도니 당시 전투경험이 쌓일 대로 쌓였던 이성계에게도 정말 정신없는 상황이었다. 타고 있던 말이 적의 표적이 되어 쓰러지자 이성계는 급하게 다른 말을 탔으나, '''바꿔 탄 말도 또 화살에 맞아 쓰러져''' 말을 연거푸 바꿔 타야 할 정도였다.[* 이성계가 타고 다니던 여덟 마리의 말 가운데 운봉에서 왜구를 칠 때에 탔다는 함흥산 말 [[태조(조선)/사용한 무구#s-1.4|유린청]](遊麟靑)과 지리산에서 탔다는 강화 매도산 말 [[태조(조선)/사용한 무구#s-1.4|사자황]](獅子黃)이 알려져 있다.] 그런 상황이니 이성계 본인도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적의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고 만다.''' 관련 전투 기록에서 본인의 무용 + 창업자 버프로 절대무적으로 나오는 이성계가 적에게 당하는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 하지만 이성계는 억지로 화살을 뽑아내고 참고 일부러 더 열심히 싸워서, 여타 병사들은 이성계가 부상당한 줄을 몰라 사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하간 정산봉의 난전에 버금가는, 그야말로 혈투가 펼쳐졌다. 이성계 자신도 죽어라 싸우다 보니 적에게 포위되기 일쑤였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의 기병들과 힘을 합쳐 돌격하는 충격력을 사용해 포위망을 돌파하곤 했다. 게다가 워낙 괴물같이 싸우며 적을 죽여대자 적도 기세에 주춤해서 이성계에게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그렇게 힘들게 싸우는 와중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이성계는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맹세하고 주위에게 소리쳤다.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을 것이다(怯者退 我且死賊)!"''' 장수가 저러는데 옆에서 "예, 저는 겁나니 도망가겠습니다."(...) 할 사람은 없을 테니, 같이 싸우는 고려군도 사기가 충천해 싸웠다고 한다.[* 이성계의 주변에서 같이 싸울 정도면 이성계의 친병이었을 테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군이 이성계의 분투로 힘을 낼 때, 왜구의 기세도 여전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왜구의 대장 아기발도가 여기저기서 날뛰며 흰 말을 타고 돌격하자 기병의 충격력에 여타 고려군은 계속 돌파당했고, 이게 반복되다 보니 고려군은 아기발도가 보이기만 해도 물러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아기발도의 무용이 워낙 대단했는지, 이를 본 이성계는 저도 모르게 감탄해서 이지란에게 사로잡을 수 없겠느냐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성계는 과거, 적이었던 처명(處明)[* [[제1차 요동정벌]]에서 이성계가 활로 위협해 그를 아군으로 만든 일화로 유명하다. 처명은 이성계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자 은혜에 감동하여 자신의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볼 때마다 목이 메여 울면서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했고 한다. [[제1차 요동정벌]] 항목 참조. 처명은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를 따라 죽어라 싸웠다. 이성계의 말 앞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이렇게 이성계의 친병들이 이성계를 호위하며 싸우니 괴물 같은 이성계의 무용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면도 있다.] 등을 항복시켜 부하로 만든 경험이 있어서 그런 목적에서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워낙 치열한 난전이 펼쳐졌던 데다 말에 탄 아기발도가 그 난전의 주역으로서 마음대로 휩쓸고 있는 지경이라 생포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이지란은 "그러려면 사람이 많이 상할 겁니다." 라면서 어렵겠다는 말을 했고, 이에 이성계는 아기발도를 생포할 생각을 포기하고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아기발도는 중갑옷을 입고 투구로 얼굴과 목을 감싸고 있어 화살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 당시 왜구가 [[훈도시]] 하나 걸치고 있는 수준이 아닌 제대로 된 무장 집단이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일본 갑옷인 [[오오요로이]]는 완전히 차려 입으면 화살에 대해 상당히 잘 막아내며 아예 활을 이용한 사격전을 상정하고 제작된 갑옷이다. 훗날 조선 시대에 쳐들어온 어느 왜구 두목은 갑옷을 입고 있어서 몸에 화살을 10발이나 맞고도 덤벼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 임란기쯤 되면 유럽권이나 아시아권이나 "아무리 화살을 쏴도 갑옷에 막힌다" + "총으로 쏴버리니 갑옷도 뚫린다" 는 기록이 다수 나타나며 화약이 주력이 되는 시기다.] 그러자 이성계는 이지란에게 '''"내가 저 녀석 투구 꼭지를 쏠 테니까, 네가 마무리해라."''' 라고 말하고 '''그대로 아기발도의 투구 꼭지를 쏘아 맞췄다.''' 투구 끈이 끊어진 아기발도가 투구가 떨어지기 직전 붙잡아 다시 투구를 고쳐 쓰려고 할 때 이성계는 다시 화살을 쏘아 투구의 꼭지를 맞추니 마침내 투구가 떨어졌다. 투구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이지란은 화살을 쏘아 [[저격]]에 성공, 아기발도를 죽여 버렸다. 이렇게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일이 벌어지자 왜구의 사기도 크게 꺾였다. 전투의 분위기는 완전히 넘어가 버렸고, 이성계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휘저어대자 대장을 잃은 적은 변변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정예군을 속절없이 잃었으며, 이 시점에서 전세는 완전히 고려군 쪽으로 기울어 왜구는 타던 말들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왜구들의 비명소리가 일만 마리 소의 울음소리 같았다고 한다. 고려군은 적이 붕괴하는 통에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완전히 사기가 올라 진격, 또 진격했다. 사면에서 공격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다수 왜구들은 도주에 실패하고 포위되어 살육당한 듯하다. 마침내 고려군은 왜구를 완전히 [[포위섬멸진|포위 -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왜구는 전부 다 몰살당하고, 70여 명의 병력만이 간신히 지리산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이성계는 그 남은 왜구에 대해서는 "어차피 적의 정예군은 다 섬멸했다." 며 추격하진 않았다.[* 다음 해 4월, 지리산에서 [[무등산]]으로 이동하는 왜구 무리가 기록 상으로 확인되는데, 이 잔당들이 지리산에서 겨울을 보내고(용케 안 얼어죽고 살아남아) 서쪽에 위치한 무등산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거기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다수는 사망했으며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도주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왜구 - 일본 관계사 : 이영 참조] '''워낙 대살육이 벌어진 통에 냇물이 모두 피로 붉어져 6일,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참만에야 물을 마시게 되었다'''.[* 실제로 피가 물에 섞이면 삼투압때문에 혈구세포가 터지면서 물이 철분으로 붉게 물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철분이 가라앉고 맑은 물은 윗층으로 분리된다. 생물학에서 혈액속의 혈청이나 혈장을 추출할 때 쓰는 방법도 이런 원리와 연관이 있다.] 바위는 왜구의 피로 붉게 불들어 혈암(血巖)이라 했다.[* 물론, 실제 바위가 피로 물들리 없겠지만, 황산대첩의 임팩트가 얼마나 강했는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직접 가서 확인까지 했다. 정약용은 원래 바위 색이 붉은 듯하다고 하며, 고려의 운명은 위화도 회군이 아니라 황산대첩에서 이미 결정되었다고 하였다.] 그밖에 말 1천 6백여 필을 얻고 무기(武器)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 [youtube(xQRe8h5-B1M)] || ||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의 황산대첩 장면.[br]여담으로 이 장면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자세한 건 아래의 '기타' 부분 참조.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