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대첩 (문단 편집) == 의의와 영향 == >"신(臣) 등이 생각하기를, 왜놈들은 표독하고 날래며 죽음을 가벼이 여겨 단병(短兵) 을 잘 사용하므로 만약 틈을 타서 근접해 예리한 칼로써 서로 접전(接戰)한다면 우리가 이기지 못할 것은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전조(前朝/고려) 의 말기를 거울삼을 수가 있겠습니다. 운봉(雲峰)의 싸움에 우리 태조(太祖)의 신무(神武)가 없었더라면 삼도(三道)의 백성이 거의 남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 《세조실록》 1457년 2월 25일 기사''' >"왜인은 본디 보전(步戰)에 익숙했고 우리는 보전에 약했는데, 더구나 그런 산골짜기에서는 말이 달릴 수가 없는데도 승첩을 거두었으니, 그 승첩을 거둔 것은 신통한 무용(武勇)에서 온 것이지 단순한 인력으로 된 것은 아니다." '''─ [[정약용]], 《다산시문집》 제14권 발황산대첩비(跋荒山大捷碑)''' 황산대첩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왜구를 물리친 대승리였지만, 진포해전과 같이 연결시켜서 보면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전까지 왜구에 완전히 농락당하며 한반도 전역을 유린당하던 고려가, 더 나아가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바다]]' 에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왜구와의 싸움은 왜구가 여러 고을을 초토화하고 있으면, 지방의 병력이 힘겹게 버티다가 뒤늦게 도착한 정규군이 간신히 막아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포 대첩을 기점으로 드디어 고려는 해상에서 왜구에 대한 반격을 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역으로 [[대마도]]를 공격하는 정도에 이를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물론이고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국가는 [[일본]]의 육상 병력에 해를 입더라도 해상에서는 적을 압도하였다.[* [[이순신]]이 대단하긴 하지만, 사실 [[원균]]처럼 말아먹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한반도의 역사를 통틀어도 '최대의 정예군 해체'를 그토록 완벽하게 수행한 인물은 전무하다.] 그 이전까지 [[무용론|'''해전에서는 어차피 발리니까 수군 키울 필요가 없다''']]는 말이 대놓고 나오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일대 반격의 시점이 '''왜구의 가장 거대한 침략'''이 이루어진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극적이다. 이는 이성계의 친병을 비롯한 고려의 정예군이 후대의 사람들의 생각보다 강성했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한다. 즉, 500여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여러 지점의 왜구들이 '''하나의 장소'''에 결집했기 때문에, 이성계에게 박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진포해전]]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승리였지만, 육지에 상륙한 병력은 내지의 왜구와 연계하여 거대한 규모가 되었고,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 관군이 무참하게 적에게 대패할 정도였다. 만약에 또 다른 대패를 당한다면 대규모의 왜구가 무사히 살아나가서 또다시 한반도를 유린하거나, 더 최악의 가정으로는 영국을 침공해서 알박았던 덴마크 [[바이킹]]들처럼 일본 본토에서 패한 [[남조]] 조정이 아예 점령한 한반도 남부로 옮겨와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버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목적이었다는 학설 역시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산대첩은 왜구의 세력이 총 집결하여 건너온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심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혼란기의 마무리를 장식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국가 영웅으로서 대하는 이성계에 대한 찬양은 장장 40여 년간 왜구에 유린되어온 고려 조정의 심정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진포 전투 - 황산대첩은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왜구의 세가 약해지는 기점을 가져왔다. 물론 왜구는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s-6.3|관음포 해전]]이 벌어진 후 즈음에도 침입 자체는 계속되었지만, 500척을 동원했던 정규군 수준의 왜구의 힘은 분명히 해적 노략질 수준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도 진포 전투 - 황산 전투의 승리는 왜구의 공격에 있어 변화를 가져왔다. || [[파일:external/oi67.tinypic.com/nx49p1.jpg|width=100%]] || || '''공민왕 21년(1372년) 이후 水軍 체계의 재검토 中 ─ 이강욱, 군사지 제 82호''' || 가장 큰 변화는 왜구의 침입 루트의 변화다. 진포해전과 황산대첩 이전까지 한반도 전 지역을 들쑤시고, 특히 수도와 가까운 강화도 부근에서 어정거리며 개경을 수도 없이 위협했으며 서남해와 서해의 세미를 완전히 털어먹던 왜구는 사라지고, 대신 동해안을 비적거리는 정도에 머물게 된 것이다. 그전까지 40여 년간 고려의 조창 및 조운선이 완전히 왜구에게 털렸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변화이다. 왜구는 이제 직접적으로 서해안의 조운선 루트를 털어먹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상륙해서 깊숙하게 진군하면서 어떻게든 내륙으로 들어가 식량을 얻으려고 하는 정도로 바뀌었으며, 이 역시 잇달은 대승으로 자신감과 경험을 얻은 고려 조정 등에서 대책을 마련해가며 점점 근절해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커진 자신감은 드디어 [[박위]]의 [[대마도 정벌#s-3|제1차 대마도 정벌]]로 이어졌다. 물론, 결정적으로 왜구 자체를 박멸하게 된 건 [[세종(조선)|세종]] 초 상왕이던 [[태종(조선)|태종]]이 주도적으로 시행한 [[1419년]] [[대마도 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군사 - 정치적 호전을 제껴두고 보자면, '''이성계 개인의 위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하다. 이전까지 이성계는 변방 출신에 별도의 세력을 가진 역전의 무장이었지만, 이제 황산대첩의 승리로 북방뿐만 아니라 고려 전국에서 손꼽히는 영웅이 되었다. 흔들리는 나라, 전쟁 영웅, 그리고 별도로 가진 강력한 세력. [[쿠데타|이렇게 되면 판이 짜여졌다고 할 만할 텐데]], 유일하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과거 [[무신정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여기에 명분을 더해줄 [[신진사대부|지식인]]의 존재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