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대첩 (문단 편집) === 세기 말의 동아시아와 고려 === || [[파일:external/oi68.tinypic.com/34dk9ac.jpg|width=170]] || || '''[[공민왕]](恭愍王)''' || [[태조(고려)|태조 왕건]] 이후 [[여요전쟁]](麗遼戰爭)을 극복하며 국가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고려는 12세기부터 문관들의 전횡과 이에 반발한 [[무신정변]]의 혼란으로 인하여 국력이 급전직하하였고, 결국에는 [[몽골제국]]의 압도적인 힘에 유린되어 원 간섭기에 접어들며 번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충자 돌림 왕들은 대부분 [[충혜왕|주색을 즐기는 일에 탐닉했으며]], 그 사이 원의 권세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힘은 강대해졌다. 이후 시간이 흘러 세계 전역에 번진 몽골의 불꽃이 차츰 약화되기 시작했을 즈음, 고려에는 [[공민왕]]이라는 영걸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고려의 부흥을 꿈꾸며 여러 조치를 취했고, [[제1차 요동정벌]]을 시도하여 약 445년만에 요동성에 진출해 보이기도 했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몽골 제국 체제가 붕괴하며 [[중국]]과 [[한반도]], [[일본]] 등이 모두 '''가히 세기말적 현상을 보이던 난세였다'''. 우선 중국은 초원로를 따라 [[흑사병]]이 퍼진데다 [[멜서스 트랩]]에 빠져버렸다. 여기에 원나라의 가혹한 지배가 이어지자 [[홍건적]](紅巾賊)을 비롯한 반란군이 천지를 가득 채울 정도로 들끓었으며, 결과적으로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은 고려에까지 번져서 '''수많은 홍건적의 대군에게''' 수도가 함락당하는 초유의 사건도 전개되었다. 또한, 원나라 군벌들이나 [[기황후]] 일파의 사주를 받은 병력이 고려 국경을 수시로 넘어오는 사건까지 빈번했다. 이렇듯 고려는 북방으로부터의 압력도 버티기 어려웠는데, 마침 일본에서도 [[남북조시대]]가 전개되면서 생긴 혼란으로 인하여 무수한 도적세력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왜구로서 고려의 해안가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왜구의 갑작스런 증가에 대한 의견들로는 일본 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면서 전란이 지속되는 통에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 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어서 먹고 살기 힘든 왜구들이 침략했다는 주장이 있고, 또는 왜구가 대규모로 침략을 시작한 시기가 일본 남조와 북조의 대결이 극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왜구를 군량미와 전비 마련을 위한 정규군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경우 왜구는 자발적인 해적이 아니라 국가나 다이묘들의 비호와 지원 아래 마치 정규군이나 사병처럼 활동한 용병으로도 본다.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2차례에 걸쳐서 정벌한 바 있는 [[규슈]] 지역이 한반도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해양 진출이 용이해서 고려와 중국을 노략질한 왜구는 규슈 출신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규슈 지역은 일본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충성하던 지역으로 전비를 확보하기 위해서 앞장섰을 수 있다. 실제 왜구들은 규슈 지역에 위치한 히라도번의 다이묘 마쓰라 가문, 사쓰마번의 다이묘 시마즈 가문의 비호를 받으며 사병처럼 활동하기도 했다. 그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에서도 악명을 떨쳤으니 바로 [[원균]]이 박살났던 [[칠천량 해전]]이 시마즈 가문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나섰던 전투이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신이 함대를 지휘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박살났다. 시마즈 가문은 현재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 왕국]]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왜구들의 배후였던 시마즈 가문이 지배하던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기도 하다.''' 규슈 지역의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는데, 조슈번은 일본 육군의 기원이 되었고, 사쓰마번은 일본 해군의 기원이 되었다. 그래서 제국주의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전함 함명이 '사쓰마'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다고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도 사쓰마번 출신으로 시마즈 가문의 측근이였다. 알고 보면 왜구와 한반도와의 악연은 길고 긴 것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도 세력들은 자신들이 남조를 계승한다고 믿었다. 일본 남북조 시대에 결국 북조가 승리했고, 수백 년이 흘러 메이지 천왕도 혈통적으로 북조를 계승했지만 메이지 천왕이 남조 초대 천왕이던 고다이고 천왕의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 이에 맞서야 할 고려에서는 권문세족들이 계속 권력을 독점하면서 폐해가 누적되어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일어났다. 국방이 허술해졌으며 중국도 원 제국이 분해되는 내란을 겪고 있었다. 왜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당시의 왜구들은 전기왜구(前期倭寇)로 불린다.[* 이 전기 왜구는 이후 나타나는 16세기의 후기 왜구에 비해서는 관심이나 연구 성과가 적은 편이다. 사료가 후기 왜구사에 비해 부족한 탓도 크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도 참조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