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덕 (문단 편집) === 초년 시절 === 1917년 6월 18일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아버지 황경환(黃慶煥)과 어머니 배현도(裵現道)[* 감리회 목사 배정일(裵貞一, ? ~ 1950)의 4남 1녀 중 장녀이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산덕(山德)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황경환이 황산덕의 출생지인 양덕군의 덕(德)과 양덕군 옆에 있는 다른 행정구역인 [[맹산군]]의 산(山)을 각각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아버지 황경환은 16세 때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주문해 독학했다. 이후 양덕군의 금융조합 입사시험에 합격해 서기로 근무하던 시절 어머니 배현도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 배현도는 일찍이 상경해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1916년 결혼하면서 중퇴했다. 이후 황경환은 [[성천군]] 금융조합 이사로 승진했다. 3살 되던 1919년 아버지가 성천군에서 전개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 투옥되면서[* 이후 공소하여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다소 감형된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상고했으나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59&evntId=0034981132&evntdowngbn=Y&indpnId=0000012845&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었다]]. 한편, 판결문에 기재된 황경환의 주소지는 평안남도 [[순천시(평안남도)|순천군]] 신창면 신창리.] 어머니를 따라 [[평양부]]로 와서 조부 황준식(黃俊植, 1861 ~ 1939)과 조모 [[청송 심씨]](1864 ~ 1945) 아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1920년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는 특별사면으로 2개월 일찍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베]](神戶)상회에서 점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사상범]] [[전과자]]라는 이유로 얼마 안 가 해고되었고, 등짐장사로 생계를 이었다. 이 시기 황산덕은 평양부 이문리교회의 유치원에 입학해 졸업했고, 5세 되던 1922년 아버지가 훗날 [[대한민국 국회부의장|초대 국회부의장]]이 되는 [[김동원(정치인)|김동원]]이 경영하는 평안고무공업사에 채용되자, 가족들은 평양부 상수구리 77번지로 이사했고, 이때 광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평양부 창전리 50번지를 거쳐 1927년 평양부 상수구리 130번지로 이주해 이곳에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80307221741&st=view&page=13&id=11&limit=10&keykind=&keyword=&bo_class=&fpage=&spage=|본적을 두었는데]], 이곳이 원적지가 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본래는 [[여순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지원했으나, 경성제국대학 미아케 교수 사건으로 조선인 출신을 배제한다는 정책에 따라 불합격했다. 이후, 1935년 4월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갑류(文科甲類)에 전체 4등으로 입학했다. 예과 재학 당시 처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유물론]]에 빠져 들었으나,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을 읽고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 [[소련]]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공산주의]]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불문학]]에 심취하게 되면서 본과에서는 [[문학]]이나 [[미학]] 전공을 희망했으나, 부친의 간곡한 만류로 [[법학과]] 진학을 희망하게 된다. 1938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학과 재학 당시 황이선과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로 인해 학부 학점은 과락을 겨우 면할 정도였다. 1939년, 아버지는 김동원과 결별하고, 젊은 부자 박승엽과 제휴하기 시작해 결국 박승엽이 상속받은 세창고무공업사의 공동 경영주에 취임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즈음 어머니는 [[신경쇠약]]을 얻어 상수구리 집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신양리를 거쳐 기림리에 집을 새로 지어 아버지와 별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1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류([[사법]] 전공)를 졸업하고, 법학사를 받았다. 1943년 6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동시 합격하여 동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채용됐고, [[경상북도청]]으로 발령받아 [[영천군]]에 근무하였다. 1944년 [[청송군]]으로 전보되었고, 1945년 경북도청 내무부 원호과로 전근됨에 따라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주하기도 했다. 1945년 3월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성북동(서울)|성북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서울)|성북동]]) 323번지에 있던 집[* 원래 [[전라북도]] [[익산군]]의 갑부 백인기(白仁基)의 별장이었다. 현재 이 주소지에는 [[https://naver.me/xGOiRYdV|길상사]]라는 절이 있다.]을 구입했고, [[8.15 광복]] 직후 상경했다. 아버지는 친구 장진섭(張震燮)과 합작해 35만원에 [[반도호텔]]을 구입했고, [[미군정]]이 들어와 호텔을 빌려 쓰게 되자, 1945년 9월부터 임대료를 받으며 호텔 사무실에서 관리사무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1946년 2월 미군정 법령이 공포되어 반도호텔이 정부 귀속재산으로 강제 편입되었고, 대신에 [[영등포구]] [[도림동(서울)|도림정]](現 [[도림동(서울)|도림동]])에 있던 [[한국타이어|조선타이어공장]](現 [[한국타이어]])의 관리인이 되었다. 황산덕은 1945년 10월에 서울시 성북구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미군정]]에 맞서 충돌했다가 1개월만에 파면당했다. 동년 12월에 미군정청 [[보건복지부|보건후생부]] 법제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1월초, 미군정청 조선인 직원 일동의 명의로 발표된 신탁통치 반대성명서를 기초한 뒤 공직을 버리고 집에서 요양하며 책을 탐독했다. [[http://www.graphys.co.kr/bin/bbs/bbs.htm?table=180307221741&st=view&id=130&fpage=&spage=§er=D&menu=on|황산덕 연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