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상규 (문단 편집) === 초년기 === 황상규는 1890년 4월 19일 경상도 밀양도호부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노하[* 호를 따온 도로명인 [[백민로]]가 있다.]에서 아버지 황문옥(黃文玉)과 허경순(許敬順)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경성지방법원이 1921년 6월 21일에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 관련 피검자들에에게 내린 <곽재기 외 14인 판결문>(이하 <판결문>)에 따르면, 황상규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이에 따른다면 그의 집안은 농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그의 집안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학업 이력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1906년 밀양 향교 안에 설립된 진성학교를 졸업했으며 1908년에 동화학교에 입학했고, 뒤이어 고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이라는 역사 교재를 저술하여 가르쳤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황성신문> 1909년 10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1908년 7월에 밀양 성내에 노동야학이 개설되었는데 생도가 200여 명에 달했지만 교비 조달이 어려워 운영이 잘 되지 않자 이를 딱하게 여긴 관청이 교사들을 명예교수로 추대했는데 그 중 체조교수가 황성규였다고 한다. 황상규는 이 경력을 디딤돌로 삼아 군내 상동면의 고명학교 교사로 일할 수 있었으며, 1910년부터 동화학교 교사가 되어 약 1년간 재직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상규를 아는 이들은 그를 [[삼국지연의]]의 [[관우]]를 본따 '관운장(關雲長)'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는 그가 관우처럼 무게 있고 믿음직스러운 언행, 굳센 의지, 강직한 성품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는 후에 그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한없이 강직하며 용감하여 기대를 많이 받았다."고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