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순원 (문단 편집) == 일생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l.nl.go.kr/img150126-5_2.jpg|width=100%]]}}} || || 젊은 시절의 황순원. 숭실중학교 졸업 사진이다. || [[평안남도]] [[대동군]] 재경리면 빙장리(現 [[평양시]] [[순안구역]] 재경리)에서 출생했다. [[평양부]] 숭덕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http://dh.aks.ac.kr/~red/wiki/index.php/%ED%99%A9%EC%B0%AC%EC%98%81|황찬영]](黃贊永)은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배포하다 체포되며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면서 [[이해랑]] 등과 '동경학생예술좌'에서 창립, 활동했다. 이 후 동경학생예술좌는 한글 말살정책이 시행될 때 까지 한국 최초로 여러 고전극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전설이 되었다. 1930년부터 신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1931년 16세에 문학지 동광에서 <나의 꿈>을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했으며 이후 1935년 발족한 동인 삼사문학의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1937년부터 소설 창작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1940년 <[[늪]]>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나 1942년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이 시작되자 평양의 빙장리로 낙향, 은둔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생몰년까지 똑같은 동갑내기면서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시인)이었던 [[서정주]]와 가장 대조되는 내용.] 그리고 1945년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 써둔 글 중 대표적인 것이 [[독 짓는 늙은이]]다.] [[광복]] 이후 지주계급으로 몰리게 되면서 결국 월남을 선택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바로 '''[[카인의 후예]]'''다.] <[[목넘이 마을의 개]]> 등을 발표, 활동을 재개하며 [[한국전쟁]]이후에는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등의 장편소설을 주로 썼고, 서울중/고등학교 교사로도 교편을 잡았다. 1957년부터 1980년 정년퇴임 시까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훗날 '경희사단'이라고 불리며 문단의 큰 축을 차지한 경희대 출신 문인들은, 모두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었다. [[류시화]], [[정호승]], [[조세희]], [[전상국]], [[한수산]], 고원정[* 문필 활동 외에 KBS1 <다큐멘터리극장>과 <역사의 라이벌> MC로 이름을 날렸다.], [[김종회#s-3]], [[이문재(시인)|이문재]], [[박주택]], [[이성부]] 등 문단에서 쟁쟁한 이름을 떨치는 문인들이 그의 제자들이다.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한 [[신봉승]]도 그의 제자 중 하나. 1985년 산문집 <말과 삶과 자유>를 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1992년 <현대문학>에 시 8편을 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말년에는 산책을 하며 가끔 제자들을 만나는 걸로 소일하다 2000년 9월 14일,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시신은 충남 천안시 풍산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황순원문학촌 옆으로 이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