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싱 (문단 편집) === 신해혁명 시기 === [[파일:16112816153869.jpg]] 우창 봉기군 지휘관 시절 황싱. 우창에서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황싱은 10월 28일 한커우로 가서 중화민국 정부 전시 총사령에 추대되어 혁명군의 전투를 지휘했다. 당시 봉기군은 우창에서 봉기한 직후 한양, 한커우를 공략했으나 얼마 안가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을 이끌고 공격해오면서 곤경에 처해 있었다. 황싱은 11월 20일 군민을 지휘해 한양에서 북양군과 격렬하게 격돌했다. 봉기군은 황싱의 지휘 아래 24일 동안 북양군에 맞서 항전해 타 지역의 혁명세력이 거사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줬다. 결국 한양을 잃고 우창으로 패퇴하긴 했지만 혁명이 무르익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황싱은 전국 17개 성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자 난징으로 가야겠다고 판단하고 현지 혁명당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창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뒤 12월 2일에 난징 공략전에 참가했다. 난징을 공략한 뒤, 상하이의 각 성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난징에 임시 정부를 설치하고 황싱을 대원수에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호북군 도독 [[리위안훙]]이 반대하자 각 성 대표들은 리위안훙을 대원수로, 황싱을 부원수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황싱은 12월 23일 쑨원이 곧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쑨원이 돌아올 때까지 임시정부 수립을 미루자며 성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중산 선생이 동맹회의 총리이나 그가 아직 귀국하지 않았을 때 내가 동맹회를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태평천국은 처음에는 승리를 거듭하여 매우 빠르게 성장했으나 몇몇 지도자들이 권리를 서로 다퉜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 우리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황싱은 진기미 등과 함께 마중하러 가서 현재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1912년 1월 난징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황싱은 육군총장을 맡았다. 그러나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임시 대총통을 맡았던 쑨원은 위안스카이와 밀약을 맺은 후 총통직을 그에게 양보하기로 결의했고 위안스카이는 밀약에 따라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하는 대신 청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수도를 난징으로 베이징으로 옮겼다. 남부 각 성 대표들과 많은 단체들이 위안스카이에게 잇달아 전보를 보내 황싱의 육군총장 유임을 요구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거부하고 측근인 [[돤치루이]]를 육군총장에 임명하고 황싱을 실권 없는 참모총장에 앉혔다. 하지만 황싱이 취임을 거부하자, 위안스카이는 다시 그를 난징 유수부 지휘관에 임명하고 난징 주재군 인수 관리를 맡겼다. 1912년 6월 30일, 황싱은 동맹회의 상하이지부 하계상회에 참석해 정견을 발표하며 "민국이 수립된 지 반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정당이 성립되지 못한 탓이라며 삼민주의, 특히 민생을 관철하겠다."고 강조했다. 그해 8월 동맹회가 국민당으로 조직 개편되었을 때, 그는 국민당 이사로 취임했다. 9월 11일, 황싱은 위안스카이의 초대를 받고 베이징에 가서 회담을 벌였다. 위안스카이는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고, 황싱은 그가 민국 제일의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황싱은 실업과 교육을 발전시켜 국가의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정세가 혼란하고 북양군벌이 중화민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뜻이 제대로 펼쳐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1913년 3월,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 암살 사건|쑹자오런을 암살했다.]] 쑨원은 즉시 군대를 일으켜 위안스카이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황싱은 남방의 각성은 내부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군대의 힘이 약하니 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되었다. 1913년 7월, 쑨원이 [[계축전쟁]]을 단행하자, 황싱은 장쑤도독 청더취(程德全)에게 위안스카이로부터 독랍하게 한 뒤 장쑤 방면군 총사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난징의 일부 군대가 위안스카이의 회유에 넘어가 이탈해 난징에 주둔한 8사단은 2개 연대를 잃고 2천명 정도 남았으며 나머지 부대는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아 전투력이 취약했다. 결국 봉기군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게 연전연패했고 7월 25일 쉬저우가 공략당했다. 이에 황싱은 7월 29일 일본으로 망명했고 계축전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후 그는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 쑨원에게 반감을 품고 그와 대립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