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장엽 (문단 편집) === 조선로동당 입당과 모스크바 유학 === 1년 반 동안 삼척에서 [[징용]]살이를 하던 황장엽은 광복을 맞이하게되고 45년 8월 20일 고향 평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황장엽은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부지를 옮겼다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부지를 빼앗기고 평양상업학교가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는 등 여러 과정을 지켜보다가. 1946년 11월 15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다. 그뒤 황장엽은 대학생 출신 때문인지 석달만인 47년 2월에는 세포위원장으로 승진하고, 1년뒤인 48년 2월에는 조선로동당 핵심간부를 양성하던 중앙당학교 이론반에 입학한 뒤, 그 해 8월에는 김일성 대학교 예비과에 입학하는 등 당의 참모 교육을 착실히 받는다. 그러던 중 49년에는 모스크바대학교의 유학생으로 낙점을 받는다. 그렇게 황장엽은 49년 10월부터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 입학했고 53년 11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다. 여기서 훗날 아내가 되는 박승옥도 만났고 52년에는 [[헬싱키 올림픽]]에 대령의 통역병으로 참여했다. 53년 11월에 황장엽은 평양으로 귀국한다. 이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평양이 토굴만 즐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황장엽은 김일성 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이후 명강의로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를 거쳐 1957년,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과장에 배치되었다. 1958년, 이론, 교양 담당 부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아부도 하지 않고 욕도 하지 않고 감정표현도 잘 하지 않아서 당내에서 부처님, 목석으로 불렸다. 1959년에 평양시 삼석구역 철봉리 당원 휴양소 근처의 저수지에서 중앙위원회 지도원 한명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황장엽이 그를 재빨리 건져왔지만 끝내 지도원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황장엽처럼 솔직담백하게 일을 하라고 그를 수차례 추켜세우기도 했다. 김일성도 그를 이론가라고 부르면서 일처리를 칭찬했다. 1961년, 참사에 임명되어 김일성의 연설 작가가 되었고 1965년, [[하앙천]]의 후임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황장엽은 이에 대해서 전임 총장 하앙천을 싫어했던 김정일이 김경희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총장 교체를 건의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설명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참가하여 중국과 소련의 노선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그런데 1966년, 김일성종합대학 설립 20주년 기념논문집에 실린 황장엽의 논문 <사회발전의 동력>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와 중앙당학교 교장 양형섭이 황장엽의 논문이 반당 수정주의 논문이라고 공격하였다. 김일성은 황장엽을 매우 강력히 비판했고 1967년 5.25 교시가 발표되면서 황장엽의 서기실 동료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설상가상으로 황장엽의 장인이 중국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되면서 황장엽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김일성은 황장엽을 남의 글을 마구 도적질해서 글을 쓴 수정주의자, 조립식 박사라고 비난했고 황장엽은 식물총장이 되고 제1부총장이 사실상 대행하는 상황이었는데, 1968년이 되어 김일성이 황장엽을 용서해주면서 다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대외문헌편집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는 한편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국가주석제가 도입되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1977년, 1982년까지 3차례 당선되지만 1983년 3월에 [[양형섭]]에게 상설회의 의장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게 된다. 3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체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1982년 선출에 대해서는 없었던 것처럼 치우는 일이 많은데 엄밀히 말해서 의장으로서 3선을 했다. 여튼 이것 때문에 역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상설회의 의장을 합쳐서 임기 중에 소환된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1979년 10월 15일, 정치위원회 회의 결정에 따라 당 부장에 해당하는 당중앙위원회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11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의 제의로 과학교육비서로 파격승진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비서국 비서에 유임되었다. 1983년에 양형섭에게 상설회의 의장 자리를 물려준 것은 비서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양형섭은 사회과학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의 직함을 가지게 되었는데, 황장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사회과학원이 선전선동부와 연합하여 황장엽에게 맞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3년 아웅산 테러의 영향으로 대남비서 김중린이 철직되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면서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었던 허담이 신임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조동되었다. 이에 국제비서 김영남이 다시 외교부장으로 조동되었고, 국제비서에는 국제부 부부장 김용순이 임명된다. 하지만 김용순이 지나친 전횡을 부리다가 김일성의 미움을 사서 1984년에 철직되면서 후임 국제비서를 맡았으나 황장엽은 권력이 많은 만큼 적도 많고 위험한 국제비서 자리를 너무 부담스러워하였고 결국 1988년 [[허담]]에게 국제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당력사연구소장 겸 문서정리실장으로 옮겼다. 이후 허담이 사망한 후 1993년 말에 [[최태복]]의 후임으로 다시 국제비서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