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적이탈 (문단 편집) == 해외 사례와의 비교 == * [[한국사]]의 왕조들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와는 이질적인 현상이다. 동아시아에서 대체로 성씨는 부계로 '''절대 바뀌면 아니 된다'''는 [[개념]]이 확립되었고 이에 따라 [[역사]]를 봐도 군주가 폐서인시키거나, 아예 왕가 전체가 몰락하지 않는 이상 왕족으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왕족으로 살았다. 더욱이 [[종친]]도 엄연히 신하라서 종친과 신하를 구분하는 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일본에서도 그걸 의식했는지 황적이탈로 부르는 일이 많다.] 한국에도 방계를 직계와 따로 분류하고 너무 멀어진 방계는 사실상 왕족으로서 지닌 [[특권]] 대부분을 잃긴 하지만,[* 5대 이상 지나야 종친에서 벗어난다.] 그렇다고 왕족이 아예 아닌 건 아니다. 이건 가까운 친척으로 인식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한데, [[조선]]은 보통 8촌까지는 직계로 구별했지만 일본은 사촌 이후부터는 딱히 교류하지 않으면 가까운 친척으로 인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촌끼리 결혼이 가능했고 [[십악대죄]]에서도 8촌 이내에 해를 끼치는 불목죄가 빠졌다.] * 대륙에서도 원칙은 종친도 [[세대]]가 지나면 일반 사족으로 격하되어 왕족의 특권을 제공받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왕손들이 점차 귀해지자 일본의 [[세습친왕가]]들처럼 왕과 가까운 왕족들이 이후 여러 세대가 지나더라도 왕족으로써의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들이 나타나긴 했다. 물론 그 경우 후손 전체가 왕족의 특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가들만 해당 가문을 개창한 군([[君]])의 특권을 유지했다. 무엇보다도 왕족의 특권만 없을 뿐이지 왕위계승권은 아주 까마득히 멀지만 [[존재]]하기는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게 삼수의 옥인데 삼수의 옥에서 밝혀진 내용이 전부 사실인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는 점을 제쳐둔 채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본다면 삼수의 옥에 가담한 이들은 경종을 [[폐위]]/[[시해]]/[[독살]]한 뒤 이이명을 옹립하고자 했는데 언뜻 보기에는 왕족으로서의 [[품계]]가 전혀 없는 이이명을 왜 지목했는지 의아하겠지만 실은 그가 [[세종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왕실과 멀어진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어쨌거나 [[전주 이씨]]이기 때문에 [[역성혁명]]은 아닌 것이다. [[한나라]]만 해도 [[복벽]]을 [[후한|거듭]] [[계한|해냈는데]] 복벽군주가 모두 황실과 [[광무제|대가]] [[소열제|먼]] [[황족]]이나 안팎에서 모두 같은 왕조로 인정하고 [[송나라]]도 미야케 같은 거 없이 [[송효종]]이 [[송고종]]의 양자가 되어 계승하고 [[송이종]]이 [[영종(남송)|송녕종]]의 양자가 되어 계승하였으나 모두 같은 [[왕조]]로 인정받는다. * 다만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사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주나라]]만 해도 [[천자]]나 [[제후]]의 후손이 대가 멀어지면 윗 문단에서 카페의 분가가 발루아나 부르봉으로 성을 갈듯이 성([[姓]])을 안 쓰고 씨([[氏]])를 쓰게 되었다. [[희씨#s-2|희성]](姬姓)에서 [[삼환]]이나 [[정나라#s-1.4.1|칠목]]과 같은 여러 씨를 지닌 가문이 갈라져 나왔다든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의 [[국성]](國姓)인 웅씨(熊氏)에서 소씨(昭氏)·경씨(景氏)·굴씨(屈氏) 등이 갈라져 나온 게 그러하다.[* 특히 초나라 왕실의 분가인 세 집안을 다스리기 위해 삼려대부(三閭大夫)를 두었는데 이것이 [[종정]]과 구실이 같다고 하니 이 세 집안은 초나라의 [[고산케]]가 아니었나 싶다.] 다만 씨를 쓰게 되어도 부계혈연이 같기에 서로 [[혼인]]이 금지되었다. [[북위]]만 해도 [[탁발씨]]와 같은 부계혈연이면서 성이 다른 열 겨레를 십주(十胄)라 부르며 오랑캐 귀족 2등급으로 정하고 서로 혼인을 금지했다. 부계혈연이 같으면 혼인이 금지되는 게 일본과 다른 점이다. * [[베트남]] [[응우옌 왕조]] 시기에는 응우옌씨(阮氏) 종실의 수가 너무 많아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자, 황실 직계가 아닌 [[응우옌씨 정권|광남국]] 응우옌씨(阮氏) 종실의 후예들[* 정확하겐 광남국 [[응우옌낌|조조]] ~ 예종의 대에서 분기한 자손들. 광남국 정립 이전([[응우옌낌|조조]] 이전) 분기한 응우옌씨들은 [[종인부]]의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에게 대거 똔텃([ruby(尊室,ruby=Tôn Thất)], 존실)이라는 성을 내려[* 원래는 종실(宗室)이어야 하지만 [[티에우찌 황제|헌조 장황제]]의 즉위 전 휘가 복면종(福綿宗)이라서 [[피휘]]를 하느라 존([[尊]])으로 바뀌었다.] 제계(帝系: [[자롱 황제|가륭제]]로부터 내려오는 황실 직계) 및 번계(藩系: 가륭제의 형제들로 내려오는 황실 방계)와 구별하였다[* 제계와 번계를 합해 황친(皇親)이라 일컬었다.]. [[민망 황제#s-2.2.2|명명제]] 항목과 [[종인부#s-3|종인부/베트남]] 항목으로. * [[류큐]]는 일본과 비슷했는데 여기는 재미있게도 국성이 상([[尙]])씨라서 종친이 대가 멀어지면 팔([[八]])을 빼서 상([[向]])씨가 된다. * [[서양]]에서는 일본과 비슷하게 왕족이 분가하여 다른 가문을 만드는 게 흔했다. 이는 [[봉건제]]적 전통의 특징이 유사했기 때문으로, 방계 왕족의 경우 계승권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왕족의 예우를 계속 해주기에는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분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프랑스]]의 경우 [[카페 왕조]]에서 분가된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있다. [[영국]]의 경우도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로 [[랭커스터]], [[요크]] 가문이 개창되었다.[* 이 두 가문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자 왕위 계승을 놓고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것이 [[장미전쟁]].][* 발루아, 부르봉, 랭커스터, 요크등의 가문 이름이 지명에서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는것처럼, 왕위 계승권에서 멀어진 방계 왕족은 자신의 영지명을 따서 새 가문을 개창한 것.] 다만 일본의 신적 강하와는 이유가 다르므로 계승권을 인정했다. 그래서 본가가 단절되면, 후에 왕가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것 때문에 [[유럽]]에서 계승권을 두고 나라끼리 싸운 적도 제법되는 편이다.[* 이러한 이유는 왕가끼리 결혼이 매우 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철저하게 자국 내에서만 결혼했다면 타국이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겠지만 혼맥이 거미줄처럼 얽힌탓에 계승권 주장을 요구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예시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직전에는 서로 다른 [[국적]]의 계승 후보가 셋이나 나오기도 했다.] * [[류리크 왕조]]는 일본처럼 [[종실]]이 따로 국성이 없다든가 성을 갖게 되면 다른 겨레로 갈라진다든가 그렇게 갈리지면 계승을 할 수 없게 되는 점이 같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혼란 시대]] 참고. [[분류:일본 황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