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주목 (문단 편집) == 문화 및 역사 == >'''今以臣爲黃州築城使, 臣嘗爲韓明澮、韓繼美從事官, 備諳其地。 自黃州以南, 山勢險峻, 西迤爲平地, 五里許抵海, 乃古棘城也。 自棘城至岊嶺, 自岊嶺至防垣, 自有山險; 其他類皆肉地, 脫有不虞之變, 皆是賊路。 必欲城棘城, 則此地皆可城也。''' >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극균(李克均)이 와서 아뢰기를, "이제 신을 황주 축성사로 삼으셨는데, 신이 일찍이 한명회·한계미의 종사관이 되어 자세히 그 지역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황주 이남으로부터는 산세가 험준하여 서쪽으로 뻗어서 평지가 되었고 5리 정도에 바다가 있으니, 바로 옛날 극성입니다. 극성으로부터 절령까지와 절령으로부터 방원까지는 자연히 산이 험하고 그 다른 부류는 모두 내지이니 갑자기 뜻하지 않은 변이 있으면 이것이 모두 적의 침입로가 됩니다. 그러니 반드시 극성에 성을 쌓으려고 하면 이 땅은 모두 성자리가 될 만합니다. "''' >---- >조선왕조실록, 성종 16년 10월 16일 계사 1번째기사 중에서 예로부터 고조선의 문화 영향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고조선 멸망 이후로는 한나라의 한사군이 설치되어 통치되었다. 한사군이 고구려에 의해 완전히 멸망되며 복속된 이후로 우동어홀(于冬於忽)과 동홀(冬忽), 동울(冬鬱)이라 는 명칭을 사용하여 불렸다. 그러다 통일신라시대에 취성군(取城郡)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으며, 후고구려의 건국이후로 누런 흙이 펼쳐진 땅이라는 뜻의 황주(黃州)라는 지명으로 정해져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후 고려 성종 즉위 2년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을 때, 최초로 황주목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993년에 고려정부에 의해 절도사주로 개편 되어지면서 천덕군(天德郡)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하였다. 그러다 현종때인 1012년에 다시 절도사 대신 안무사가 파견되며 개편이 일어나면서 이후 다시 목으로 바뀌게 된다. 1269년에 원나라 동녕부에 강제로 예속되어지며 고려의 영향권에서 멀어져 갔다가, 고려의 노력으로 9년 뒤에 수복되었다. 공민왕때에 이르러 황주목이라는 명칭으로 곧바로 환원되었고, 고려 멸망 이후로도 쭉 황주목이라는 명칭을 유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