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철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광복]] 이후 극단 아랑은 해산되었고, 황철은 극작가 함세덕, 배우 서일성 등과 함께 낙랑극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나, 공연한 작품들이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고 급기야는 극장 대관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당대의 탑스타 황철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었겠지만, 사실 낙랑극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극단들이 흥행 실패와 극장 대관의 어려움으로 인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극장들이 대부분 흥행밖에 모르는 모리배들 손에 넘어가고 말았고, 그러한 모리배들이 흥행이 안 되는 연극에다 극장을 대관하는걸 꺼렸기 때문이다.] 연극의 흥행력이나 영향력이 1930년대 같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에 돈을 대려는 사람이 없었고, 연극 공연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배고픈 연극인들은 좌익 쪽으로 편향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북한]]에선 연극인들에게 극장을 무상으로 준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러한 소문에 연극인들은 자연 북한을 동경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많은 연극계 인사들의 [[월북]]이 시작된다. 이런 상황에서 황철은 좌익 연극인들의 대표기관이던 연극동맹에 그 이름을 올렸으며, 1946년 11월에 [[남로당]]의 결성대회에 축사를 하였고 그로 인해 사실상 남로당에 가입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다만 그 당시 황철이 실제로 남로당에 가입을 하였고, 공산주의자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인터뷰 등에서의 그의 언행을 보면은 [[공산주의]]적인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또한 12월에는 연극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이 되었는데, 이로인해 황철은 우익 단체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47년]] 3월에는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고, 같은해 7월에는 사실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춘천]]으로 지방 공연을 갔다가 우익단체의 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철은 크게 충격을 받고 [[멘붕]]했다고 한다. 당대의 톱스타로서 무대에서 박수 갈채를 받는데 익숙해져 있던 그였기 때문에, 무대에서 테러를 당했다는 건 그만큼 황철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큰 충격이자 배우 생활 20년만에 처음으로 겪은 크나큰 치욕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사건이 황철이 월북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여운형]]이 암살되어 [[좌우 합작 운동]]이 사실상 완전히 와해되자 [[미군정]]은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과 탄압을 시작하였고, 연극동맹 같은 좌익 단체에 가입을 했다는 혐의만으로도 체포 사유가 되었다. 황철도 그렇게 미군정에 체포되었으나, 경찰청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으로 정치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런 상황에서 황철은 1948년 8월[* [[월북]] 배우들 중에서 가장 늦게 간 편에 속한다.] 마침내 '''[[월북]]'''을 하였는데, 불륜 상대였던 문정복 역시 결국 남편과 당시 8살의 아들 [[양택조]]를 버려둔 채로 정부인 황철을 따라 월북을 하였다. 충격적인건 당시 문정복만 황철을 따라 월북한 게 아니라 황철을 따라 월북을 한 여배우들이 몇 명 더 있었으며,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여배우는 황철을 따라 월북하려다 [[삼팔선]]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제지당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월북 후 황철은 [[사리원]] 형무소에 수감되어 몇 달 동안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았고, 이후 북한의 국립극장에 배속되어 연기활동을 재개하는데, [[평양]]에서도 황철의 인기와 위세는 대단해서 어떤 연극에서는 같은 배역을 황철과 배용이라는 배우가 번갈아 가며 공연을 했는데, 황철이 공연할 때는 표가 없어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만원이었던 것에 비해, 배용이라는 배우가 공연을 하는 날에는 객석의 절반 이상이 텅텅 비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황철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도 문화공작대로 편성되어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이 때 황철과 [[심영(배우)|심영]]은 서울해방공연을 하기위해 완장을 찬 채 화려하게 [[서울]]로 귀환하였고 자신들과 친분이 있었던 여러 연극계 인사들을 강제로 [[납북]]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최은희(배우)|최은희]], [[김승호(1918)|김승호]] 같은 배우들이 황철과 [[심영(배우)|심영]]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 일 때문에 최은희는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참혹한 고초를 당하기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악행으로 인한 천벌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황철은 [[수원]]에서 [[평택]]으로 가던 길에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황철은 [[1951년]] 4월, 국가훈장 2급을 수여 받는다.[* 소설 '순애보'의 작가 박계주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포로로 붙잡혀 납북되다 간신히 탈출하였는데, 이 당시 그가 황철과 [[문예봉]]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고, 이 때 황철은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그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황철과 훈장을 같이 받은 이는 [[이기영(소설가)|이기영]], [[한설야]], [[이태준(소설가)|이태준]], [[임화]], 조기천.[* [[주체사상파|주사파]]들의 경전 격인 서사시 '백두산'을 쓴 고려인 출신 시인.], [[최승희]], 이상 7명인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최승희]]와 같은 등급의 훈장을 받는다는건 사실 전선에서 중상을 입고 오른팔을 잃기까지한 황철에게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처사였다. [[최승희]] 항목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최승희는 [[한국전쟁]] 도중 중국에 머물고 있었고 인민들이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중국]], [[소련]], [[동유럽]] 등지로 해외공연을 다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북한]]에서도 엄청 까이고 있었는데, 그런 최승희와 황철이 같은 등급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파일:external/cfs4.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g3SlhAZnM0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gvODk2LmpwZy50aHVtYg==&filename=896.jpg]] 연극 '이순신 장군'에 출연한 황철 어찌 되었든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황철은 낙심하지 않았고, [[김일성]]의 배려로 [[헝가리]]에서 제작된 의수를 착용하고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53년]] 조영출 작 '이순신 장군' 에서 황철은 [[이순신]] 장군을 연기하였는데, 관객들이 그의 오른팔이 의수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열연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와 무대에서의 투지로 황철은 1955년 8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민족예술발전을 위한 사업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예술인"으로 선정되어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이후 황철은 국립극장 총장과 교육문화성 부상[* 오늘날의 남한으로 치자면 문화관광부 차관 정도 된다 볼 수 있겠다.]이 되었고,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황철은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면서 평양연극영화대학교의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 연극이론서인 '무대화술'과 '분장론'을 저술했다. 참고로 '무대화술'의 경우 남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남한에서도 그 내용을 인용한 논문이나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극의 여배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2738761|우인희]]도 황철이 평양연극영화대학교의 교수로 있을때 그의 제자였고, 황철이 직접 배우로 발탁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 도중 입은 중상의 후유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1961년 6월 9일 비교적 이른 5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53년]]의 남로당 숙청, 1956년의 [[8월 종파사건|8월 종파 숙청]]도 무사히 살아남았고, 최고의 위치에서 그야말로 편안히 죽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월북 예술인들이 불행한 말로를 맞이한 거에 비하면 편안한 말로를 맞이했다 볼 수 있겠다. 특히 최승희의 말로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사후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반대로 황철이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은 어쩌면은 [[최승희]]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최승희가 숙청되었던 1967년은 [[갑산파 숙청 사건|갑산파가 숙청]]되었고, [[김일성]]의 5.25 교시 후 [[도서정리사업]]이 시작되며 김일성의 우상화가 본격화되던 시기이며 김정일이 문화계의 전면에 나서며 혁명 가극, 영화 등을 창작하며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다. [[문예봉]]도 이 시기에 협동농장으로 쫓겨나서 198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는데, 문예봉이 처신을 잘못 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철이라고 과연 숙청을 피할 수 있었을까? 싶다. 뭐 결국에는 일찍 죽은 게 복인 셈.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최승희와 그녀의 딸 안성희, 한설야, 송영 등 수많은 동료들과 달리 그의 죽음은 로동신문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정중히 예우받으면서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