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현 (문단 편집) == 생애 == 1855년([[철종(조선)|철종]] 6) [[전라도]] [[광양시|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黃時默)과 어머니 [[노(성씨)|풍천 노씨]]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시대 명문가 중에 하나인 장수 황씨 [[가문]] 출신으로 직계 조상 중에 유명한 인물로 [[세종(조선)|세종]] 대의 명재상인 15대조 [[황희(조선)|황희]]와 [[임진왜란]]의 명장인 10대조 [[황진]]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인조반정]] 이후에 쇠락하였고 7대조 황임구(黃任龜)가 정6품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낸 이후로는 이렇다 할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황현이 출생할 당시에는 시골 유생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황현은 11세부터 천사 [[왕석보]](川社 王錫輔)(1816~186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의 동문으로는 [[대종교]]로 유명한 [[나철]], 계몽운동가 [[이기]] 등이 있다. 1888년([[고종(대한제국)|고종]] 25) 34세의 나이로 식년시 생원시에 1등 2위로 급제했는데[[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88_037734|#]] 이는 그가 상당한 문학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황현보다 20년 아래인 [[이승만]]이나 [[김구]]조차도 과거에 응시해서 떨어진 전력이 있다.] 쇠락해가는 가문 출신임에도 생원시 초시에는 차석을 따냈고 생원시 복시에서는 [[과거 제도|장원 급제]]를 하며[* 생원시 합격 후 바로 등용되는 관리가 현재로 치면 7급~9급 [[공무원]]이니 공무원 공채시험 최종 전국 수석 합격자로 생각하면 된다.] 성균관에 입학하였지만 과거장의 부패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조선의 대표적인 재야 인사가 된다. 그는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형제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쌓았고 특히 다산 [[정약용]]의 저서를 연구하며 이를 크게 고평가했다. 전라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 군이 다르기는 하지만 황현의 고향인 서석촌에서 15km 정북에 위치한다. [[섬진강]] 유역.]으로 이주한 황현은 그 곳에서 16년을 살면서 많은 저술 활동을 했는데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梧下記聞)으로 그 중 『매천야록』은 [[한국사(교과)|한국사]] 교과서에서 구한 말 시기의 참고 자료로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있는 편이다. 1902년 전라도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다시 이주한 황현은 [[을사늑약|을사조약]] 이후 자결한 [[조병세(문인)|조병세]], [[민영환]] 등의 애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시]]를 지어 그들의 혼을 애도했는데 아래는 조병세의 죽음을 듣고 지은 시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어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민영환의 죽음에는 <혈죽>이라는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추모했으며 [[일본 제국|일제]]에 빌붙은 [[친일파]]들을 조롱하는 시들을 지어 그들의 행태를 풍자하기도 했다. 이후 황현은 1907년부터 전라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壺陽) 학교를 지어 신학문을 가르쳐 인재들을 양성하려 했지만 기울어가는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박탈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황현은 [[맥수지탄]]의 심정을 담은 아래의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소주]]에 [[아편]]을 섞어 마셔 목숨을 스스로 끊었으니 [[향년]] 56세였다. 묘지는 [[고향]]인 전라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에 있다. [* [[https://blog.naver.com/ds1481/222563690921|매천역사공원]]] ||亂離潦到白頭年(난리료도백두년)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지 못하였네. 今日眞成無可柰(금일진성무가내)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妖氣晻翳帝星移(요기엄예제성이)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久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누지) 구중궁궐도 침침하고 낮 누수(漏水) 소리만 길구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조서(詔書)와 칙서(勅書)도 이제부터 다시는 없을 것이니, 琳琅一紙淚千絲(림랑일지루천사)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鳥獸哀鳴海嶽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찌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삼천리는 이미 물속에 잠겼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曾無支廈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나,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불시충) 그저 인(仁)을 이루고자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어라.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기껏 겨우 윤곡(尹穀)[* 중국 [[남송]] 대의 문인이자 [[진사]]로, 몽골의 남송 침입 당시 일족이 몰살당하자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그 뒤를 따라 자결했다.]을 뒤따름에 그칠 뿐,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그 때의 진동(陳東)[* 중국 [[북송]] 대의 문인. [[흠종]]이 즉위하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간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결국 죽임을 당했다. 진동의 예를 들어 나라가 아직 망하기 직전 죽음으로 간언하여 이를 바로잡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 대목이다.]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럽도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 1858~1924. 이건창의 동생으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은 황현의 자결을 듣고 시를 지어 황현의 죽음을 애도했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 / 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 / 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 / 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