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화론 (문단 편집) == [[유럽]]에서 == 이 "황화"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주창한 사람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이다. 이러한 황화론은 당연히 [[인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사실 황화론과 인종주의의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황인종]]에 대한 멸시적 인종주의 뿐만 아니라, 당시 독일 제국의 [[범게르만주의]](Pan-Germanism)과 그와 충돌하고 있던 동시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Pan-Slavism)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때는 마침 [[부동항]]을 찾아나서던 제정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뒤늦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대영제국]]의 동아시아 진출이 맞물려있던 때로, 동시에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승기를 잡아가면서 일제의 국제적 발언권이 높아지던 시절이다. 빌헬름은 이를 자신의 제국과 대치 상황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발칸 반도]]와 그 너머로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킬[* 19세기 당시와 심지어는 그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 때까지도 [[볼가 강]] 유역에 [[독일계 러시아인]]이 실존했다.] 기회로 보고 마침 새로운 열강으로서 힘을 확장시킬 단계에 있었던 일본을 경계 대상으로 주창하여 러시아와 영국이 자국의 국력을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집중시키는 상황을 유도하려 했다. 실제로도 (몇십년 전만 해도 [[페리 제독]]이 "개화시킬 야만족" 취급을 하던) 일본의 갑작스런 국력 신장을 마주했던만큼 러시아와 영국이 둘 다 이러한 황화론에 성공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가장 큰 결과로 [[러일전쟁]]이 벌어져 러시아측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야 했다. 다만 빌헬름 2세 본인이 그 기회를 틈타 범게르만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본래의 의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황화론 주창 자체는 외교적으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으나 정작 독일 제국 자체가 내정이 [[시망]]인 탓이었다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역사학계에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뤄놓은 것을 까먹기 바빴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런 평가를 유독 가혹히 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하버드대학교의 [[조지프 나이]].] 빌헬름 2세가 일본에 대한 황화론을 펼치는 데에는 보다 통속적인 원인이긴 하지만 빌헬름 본인이 '''그냥''' 일본인들을 싫어했다는 것도 있었다.[* Buruma, Ian. .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 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고 독일과 중국에서 싸웠으니 감정이 좋기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유럽으로 유학 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다른 극동인들에 비해 일본인들은 아예 국가 차원에서 [[프로이센]]을 모델로 한다며 유학을 보내는 일이 많았으니 일본인들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는 일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빌헬름 2세 입장에선 독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몰려오는 데다가, 나중에 이들이 전쟁에서 뒤통수를 친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빌헬름 2세는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대한제국 시절 [[고종(대한제국)|고종]]과의 개인적 친분을 다지기도 했다. 일단 유럽과 러시아 일대에서의 황화론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