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희(조선) (문단 편집) ===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다 === 1427년(세종 9)부터 1435년(세종 17)까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하다. 황희는 보수적이고 강직한 스타일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던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군자]]로 [[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강한 결단력, 추진력과 6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결합되어 [[정책]] 회의 때마다 주목할 만한 의견을 자주 냈고 복잡한 토론을 거쳐도 결국 황희의 안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만한 성품의 동료 정승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주로 융통성과 센스가 필요한 일처리에 능한 편이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황희의 졸기(卒記)를 남기면서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보수|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했다. 그는 정책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고는 했는데, 이런 그의 능력이 세종에게 가장 필요하였다. 세종은 스스로 독창적인 주장을 내기도 했고 가능한 모든 논점을 검토한 뒤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정책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도 종종 나왔으며 온갖 주장이 난립하여 심의가 길어져 쟁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었다. 여기서 황희는 대국적으로 주장을 정리하고 가장 현실적인 시행 방안을 내어 정책을 조정했다. 황희가 온갖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세종이 괜히 그를 끝까지 부려먹은 게 아니다. 1449년(세종 31)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있으면서 세종을 훌륭히 보좌하여 [[농업]], 예법, [[군사]], [[법률]] 등 각종 국정에서 세종의 [[정치]] 고문이자 명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명성을 떨쳤는데 벼슬살이만 73년을 했다. --[[공밀레|황밀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