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희(조선)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한편으론 황희의 악행이 부풀려진 부분도 있는데, 이호문이라는 사관은 아래와 같이 황희의 비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왜곡]]된 평가를 남기기도 했다. >(전략)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처와 [[간통죄|간통]]했다.(후략)[*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박포의 처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도망친 것을 황희가 모처에 숨겨주었고 이것이 와전되어 황희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묘사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006025_001|#]]] 이 때문에 훗날 실록을 편찬할 때 [[정인지]]나 [[성삼문]] 같은 이들이 이 사건을 부정했고, 결국 의견이 모아져 삭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실록을 고친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이유로 결국 이 글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fa_10007004_003|#]] 당연하지만 황희를 존경스러운 조상으로 모시는 장수 황씨 대종회 등에게 있어서 이호문은 [[천하의 개쌍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언론 매체 등에서 "충격! [[청백리]] 황희의 본모습?!" 같은 식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이호문이 쓴 왜곡글 때문이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2013년 오마이뉴스의 황희의 간통/뇌물을 언급한 보도와 2015년 국회의원 [[김진태]]가 라디오 인터뷰에서 황희도 간통과 뇌물을 받은 관리라는 발언에 대해 황씨 대종회에서 그것은 이호문이라는 사관이 왜곡했기 때문이라며 바로 반박을 하였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5/0000764027?sid=100|#1]][[https://n.news.naver.com/article/079/0002703943?sid=100|#2]] 즉, 황희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행적은 사관 이호문 때문에 잘못 알려지고 과도하게 부풀려진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https://shindonga.donga.com/3/home/13/1690425/1|1]][[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08/564387/|2]][* 다만 해당 기사 외에는 대부분 진실일 수도 있는데 애초에 이호문이 지은 다른 기록도 문제가 있다면 함께 공론화가 되어 문제가 있다고 기록이 남아야 할거고 문제가 된 기록처럼 사건을 부정하는 사람이 나오는 등 구체적인 확인과정이 거쳐져야 한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문제된 기록이 없다. 즉 다른 황희의 범죄에 대한 기록들은 아무리 부정적으로 봐도 사실확인을 해줄 사람이 없고 그럴만한 정황증거라도 있어서 문제제기가 안 되었지만 이 기록은 누가봐도 거짓말이고 거짓말임을 밝혀줄 증인까지 있어서 문제제기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글쓴이가 맛이 가서 그러니 적당히 거르면 된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이호문 건 외에 사위와 자식들이 문제를 일으킨 부분은 사실이다. 이것들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지 황희 본인이 부패했다고 볼 여지는 없다. 다만 친족의 부정행위도 사전에 막을 정도로 대쪽 같은 [[청백리]]까지는 아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해석해 보면 친족의 문제는 물불 안 가리고 개입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정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식을 앞세워서 대규모(?) 부정부패를 조직하고 이득을 얻었다는 혐의는 없다. 황희의 권력 개입은 본인의 이득을 위해 사건을 일으키는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친족들이 일으킨 사건 무마인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고위 관료로서 비판받고 탄핵받을 사유는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한 차례 파직을 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신 세종이 내린 처벌은 [[은퇴]]도 [[안식년]]도 없는 종신 노역형이라고들 역덕후들 사이에서 그러지만, 사실 황희가 사표 쓰고 세종이 이를 반려하는 행위가 세종이 황희를 외부의 여론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오랜 기간 정승 자리를 유지하도록 감싸준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조선은 정승을 종신까지 부려먹는 인정 없는 사회가 아니다. 당시 위에서 본 사례들을 가지고 황희가 청렴하지 못했다고 하는 비판의 기본 논조는 황희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쉽사리 손에서 내려 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황희는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재상을 약화시키고 비서 기구인 승추부를 강화하던 시기에 비서실장인 지신사였고[* 즉위 초 태종은 재상 대신 비서 기구를 통해 [[육조]]를 장악하려고 하였으므로 [[이조(조선)|이조]]를 담당하던 지신사가 재상의 권한을 침범한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 [[6조 직계제]] 시행 전후를 기점으로 폐세자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 육조의 판서직을 두루 맡았으며, 재상의 권력을 키워주던 세종 시절에는 계속 재상으로 있었기 때문에 거의 40여 년 넘게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늙은 관리가 [[치사#致仕]]를 청하는 것은 의례적으로 되풀이되곤 하던 일이라 냉정하게 따지면 황희가 내심 언제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후임자 [[하연(조선)|하연]]은 늘 그랬듯 의례적으로 치사를 청했다가 [[문종(조선)|문종]]이 선뜻 받아들이자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황희는 명예롭게 경력을 마무리했다. 중국 사신들마저도 황희에게만은 깍듯이 대했고 은퇴하고 나서도 의전에서는 다음 영의정 [[하연(조선)|하연]]보다 위였다. 시호인 익성(翼成)의 익(翼)은 사려가 심원했다는 뜻에서, 성(成)은 재상이 되어 끝까지 잘 마쳤다는 뜻에서 붙여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