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희(조선) (문단 편집) === 부정적 평가 === [youtube(5ae7SRZsWbs)] 한 번은 [[사위]]인 서달이 시골[* 신창현.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이 신창현이 [[맹사성]]의 고향 동네여서, 황희의 부탁을 받은 맹사성이 신창현과 그 주변 고을의 현감들에게 사건 무마를 지시한다. 물론 나중에 세종에게 다 들통나서 황희, 맹사성과 신창현감, 신창현 주변의 5개 고을의 현감이 모조리 파직당한다.]을 지나다 [[아전]]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지 않고 달아나자 감히 좌의정의 사위이자 형조판서의 아들인 자신을 몰라봤다고 종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하였다. 종들이 길 가는 다른 아전을 잡아 패며 달아난 아전의 집으로 자신들을 인도하게 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다른 아전 표운평이 이를 보고 항의하자 종들이 표운평을 패서 서달 앞에 데려갔다. 길 가다 두드려맞은 표운평이 황당하여 아무 말이 안 나오니 서달은 표운평이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저놈이 낮술을 했구나! 버르장머리를 고쳐줘라!"하며 작대기로 그를 50대나 때리는 바람에 그 다음 날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지방 관아에서 사건의 전말을 조사했더니 어렵지 않게 정황이 밝혀졌으나, 서달의 아버지 서선이 바로 형법을 담당하는 형조판서인 데다 장인이 조정 실세인 황희였으니 알아서 긴 수령은 중앙이 아닌 좌의정 황희에게 사건을 먼저 알려버렸고, 서선과 황희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작]]에 착수했다. 물론 서달의 아버지 서선은 고려 시대 명신 [[서희]]의 12대손으로 현재 검찰과 법무부의 수장 격으로 조선의 모든 범죄 처리를 관할하는 수장인 형조판서의 입장이었으므로 굳이 장인인 황희까지 나서서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긴 힘들지만 황희의 유능함을 볼 때 이 사건을 몰랐을 리도 없고 최소한 묵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의 벌어진 은폐 행각이 매우 심각했다. 피해자의 처를 [[협박]]하고 [[뇌물]]을 써서 그 친족을 회유하거나 일의 처결을 맡은 지역 수령을 맹사성과 힘을 합쳐서 동향이라는 연고를 내세워 압력을 가하고 급기야 사건의 전말을 왕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도중에 짜고 가로채는 짓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주변과 입을 맞춰 서달은 은근슬쩍 묻히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 그의 노비인 잉질종이 범인이라고 다 뒤집어씌우는 식으로 사건 내용을 조작했는데, 이에 연루되어 조작에 가담한 관리가 수십 명에 달했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의 사건이 조작되어 황희의 사위는 별일 없이 넘어갔겠지만, '''그들의 상대는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어본 다음 이상하다며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고, 진상이 밝혀졌다.[* 당대 최고 재상인 황희, [[맹사성]]에 6조 판서들, [[과거]] 대과에 급제해서 공직에 진출한 수많은 신하들이 몇 주 동안 의심 안 가게 증거를 조작한 결과물이었지만, 그렇게 나온 결론이 '''노비 한 놈이 2~3급 정도 되는 공무원을 패죽였다'''는 것이니 수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선은 말할 것도 없고 황희와 맹사성뿐만 아니라 관련된 주변 벼슬아치들은 곤장을 맞거나 유배를 가는 등 난리가 났다. 윗사람 뒤처리하다가 아랫사람들도 덩달아 피 본 셈. 그나마 황희와 맹사성은 며칠 뒤 복직했으며 사건을 일으킨 서달은 원래는 사형이었지만 [[독자]]라는 이유로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 3년 노역 치 벌금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사실 이들이 벌인 가장 큰 죄는 기군망상죄, 즉 왕을 속이려 했던 것이라 전원 사형당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세종이 그래도 많이 봐준 셈이다. --대신 죽을 때까지 세종대왕에 의해 갈려나갔다--][* 게다가 피해자인 표운평도 아전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이지만, 결코 입지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표운평이 참변을 당한 이후 그의 아들이 분노하여 '''기병 40기'''를 이끌고 서달을 쫓아가서 현감과 앉아 있는 것을 끌어내려 그의 발뒤꿈치를 활로 쏴 장애인을 만들었을 정도. 당시 말과 기수의 유지비용이 얼마나 비싼지를 생각해보면, 현대로 치면 '''기갑부대'''를 동원할 수 있는 지역 유력자를 빈정 상했다고 죽인 것이다.] 이외에도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감싸주기 위해 다소 구차한 변명으로 세종에게 호소해 이들을 구해준 적도 있고, 관청에서 몰수한 장남 황치신의 과전을 돌려주려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적도 있다. 이런 행적을 보면 자식과 친인척에 관련된 일에는 물불을 안 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에서 일할 때 금잔 등을 훔치다가 적발된 다음 조사 과정에서 차남 황보신은 더 많이 훔쳤다는 것이 걸렸으며, 황보신의 땅이 압수되는 과정에서 황치신이 황보신의 기름진 밭을 자신의 돌밭으로 바꾸려다 또 걸리는 등 집안이 제대로 개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때 황희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서자 황중생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며 황중생의 성을 조씨로 바꿔버렸다. 이건 [[대인배]]라는 평가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황희는 이때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른 황보신은 그냥 내버려 두고 황중생만 전수조사 당하는 빌미를 줬다고 화풀이하듯 족보에서 파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세한 사건의 전개를 보면, 황중생의 경우는 황희와 절의 여종 사이에 태어난 서자인데 워낙 무능해서 벼슬할 생각조차 안하고 그냥 놀고 먹었다. 결국 황희라는 아버지 이름값으로 문종이 기거하는 동궁전에 세자 친구 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다른 것도 아니고 궁중의 창고의 물건을 훔쳐서 집에 가져간 것이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이걸 이복형인 황희의 적자 중 둘째 황보신에게 줬다고 해서 일이 커졌다. 황보신의 경우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수사한 결과 드러난 것인데, 조사해 보니 황중생보다 더 많은 재물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유는 첩 선물용. [[장물]]을 받은 첩까지 같이 잡혀갔다. 공금 [[횡령]]이다. 결국 삭탈관직에 직첩이 떨어지고 과전이 나가떨어진다. 게다가 이게 겨우 수습 국면에 들어가는데, 황보신의 과전이 반납되는 과정에서 적자 3형제의 장남 황치신이 끼어든다. [[몰수]]되는 동생의 비옥한 과전을 자기가 먹고 대신 자기의 척박한 과전을 대신 반납해 버리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공무집행방해#s-4.2|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현대 대한민국은 국가의 행정 작용의 연원이 [[헌법 제1조|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에서 나오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행정 작용의 연원이 [[전제군주제|왕에게서 나왔다.]] 따라서 현대법에서 [[국가적 법익에 대한 죄]]로 해석되는 죄들은, 조선 시대에서는 왕을 능멸한 죄가 된다. 더군다나 유교 문화권에서는 왕에게 진심어린 충성을 바치지 않는 모든 행위가 반역으로 취급되었다!] 결국 황희를 가급적 커버해 주려던 세종도 도저히 못 견뎠는지 황치신까지 파면해 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삼연벙|적자 서자 할 것 없이 비리 콤보 3연타가 줄줄이 터졌고]], 그 시작이 서자 황중생의 궁중 창고 절도 사건이었으니, 황희의 분노가 황중생에게 몰린 것은 당연한 거다. 위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적자 3형제의 막내 황수신은 계유정난에 협력 또는 묵인하고 황희의 후손이라는 덕을 보아 영의정까지 올라 가장 크게 되었다. 다만 그도 [[음서]] 출신[* 황수신이 사마시를 보러 갔을 때 시험관이 답안을 보고는 대놓고 시험 보러 왔냐 놀러 왔냐라고 할 정도로 모욕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황수신은 이후 각고의 노력을 하며 공부를 한 끝에… 음서로 관직에 나간 것이다.]이라 가문의 힘이 컸다. 친한 사이라고 부정 인사를 저질러서 관직 삭탈을 당하고, 아산 전체를 농장으로 바꿔버리는[* 심지어 이건 일반적인 수준의 치부가 아니다. 저 아산 지역은 국유지이고, 일 시켜 먹은 사람은 공노비다.] 등의 치부를 해서 [[탄핵]]을 당하는 등 아주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조선 시대 치부의 모습을 보여줬다.[* 덧붙여서 황희의 아들들 셋 중에서 두 명은 [[계유정난]] 후 세조를 지지했다. 정작 황희는 세조와 맞선 김종서를 키우고 후사를 맡겼다. 그럼에도 황희의 명성 때문에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잡은 세조는 황희와 자식들에게 높은 지위를 맡겼다.] 이런 큰 비리에도 황희의 음덕으로 용서받고 영의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 세종으로선 유능한 대신의 약점을 잡고 있으니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