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회령시 (문단 편집) == 역사 == [[남북국시대]]까지는 [[고구려]]와 [[발해]] 등 예맥계 국가의 영토였으며 [[발해]]가 [[요나라]]에게 멸망한 이후로는 [[고려]] 왕조 내내 회령을 비롯한 지금의 두만강 영역은 [[여진족]]의 영토였다. 고려 말 [[공민왕]] 대에 동북 9성 이후 중단된 북진정책을 재개하면서 [[쌍성총관부]]를 비롯한 [[길주군|길주]] 이남의 영토를 수복하였고 고려를 계승한 [[조선]] 역시 태조 [[이성계]]의 조상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북진정책을 이어갔는데 1398년 두만강 이남 지역을 수복하고 [[경원군|경원부]]를 설치하였으나 여진족의 준동으로 인해 1409년 경원부를 [[경성군|경성부]]로 후퇴시켰다. 그후 경성부 이북 지역은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무주공산이 되었는데 1423년 오돌리 부족의 추장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훗날 청나라를 세우는 숭덕제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6대조이다.]가 부족을 데리고 지금의 회령 지역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회령은 [[여진어]]로 와무허(斡木河)라고 불렸다. 1433년 [[우데게족|우디거족]]이 와무허의 오돌리족을 기습해 먼터무가 살해당하고 부족은 두만강 너머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 기회를 틈타 [[세종(조선)|세종]]은 다시 두만강으로의 북진을 개시하였다. 1432년 석막(石幕)[* 지금의 부령군 석막면]에 설치한 영북진(寧北鎭)을 1434년 백안수소(伯顔愁所)[* 지금의 [[종성군]] 행영면.]로 이동시키고 이를 [[종성군|종성]](鐘城)이라고 하였다. 또한 석막과 백안수소의 중간지점이자 두만강 코앞에 있어 여진의 내습이 쉬운 와무허에 새로 진을 설치하였는데 와무허의 한자 음역인 '오음회(吾音會)'의 '회(會)'에 '영북진'의 '녕(寧)'을 따 '회령진(會寧鎭)'이라 하고 그해 가을에 회령진을 회령도호부로 승격시켰다. 1895년 [[23부제]] 시행과 동시에 전국 행정구역을 일괄적으로 [[군(행정구역)/대한민국|군]]으로 개편하면서 회령도호부는 회령군이 되었고 1914년 [[동해]]와 접하고 있던 [[월경지]]인 관해면이 [[부령군]]으로 이관되었다. 1931년 회령면이 회령읍으로 승격하였고 1943년 봉의면과 운두면을 합쳐 보을면이 되면서 1읍 6면을 관리하게 되었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주도했던,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30104000176|회령 전투가 있었다]]. [[영웅(뮤지컬)]]에서 대사로만 언급되지만, [[영웅(2022)]]에서 본격적으로 전투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에 따르면, 안중근이 이끄는 군대는 앞서 진행한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를 잡지만, 만국 공법을 준수하기 위해 이들을 풀어주었다. 석방된 일본군은 훗날 안중근의 군대에 야습을 시도했고, 포로 중 한 명이었던 '와다'는 안중근의 총알을 맞아 얼굴에 상처가 남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 경찰로서 안중근을 쫓아다녔다. 북한 치하에서 1952년 [[유선군]]이 분리됐다가, 1974년 다시 병합됐다. 1991년 7월 시로 승격되었다. [[종성군]] 지역에서 일부지역을 편입했는데 그곳에 [[회령 수용소]]가 있었으나 폐지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