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회암사 (문단 편집) === 조선 왕실의 원찰 === [youtube(1lvXzqpu0VU)]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조선)|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회암사의 주지였으며 고려 말 불교계에서 고승으로 추앙받은 [[나옹(승려)|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를 (스승 나옹화상처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불교]] 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숭상하였다. 반면 불교를 싫어한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은 불교가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본격적인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했다. 재위 중 [[원경왕후]]가 병에 걸리자 승려들을 불러 모아 '너희들이 평소에 그리 연마하는 도가 얼마나 효험 있는지 보자. 만약 아무 효과도 없으면 불교는 그 날로 조선에서 완전히 박멸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승려들은 정말 내일이 없다는 심정으로 절박히 기도했고,[* 어떤 승려는 이마를 불사르고, 또 손가락을 태워 기도하는 승도 있었다.] 원경왕후가 어느 정도 병세가 완화되자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내려주는 걸로 답례를 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조선)|세조]]의 지원에 힘입어 회암사는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조선)|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을 두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반대하는 신료들을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회암사는 역대 국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함경도에 있는 안변의 [[석왕사]](釋王寺)[*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꿈을 풀이해서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데에서 '석왕사'라는 이름이 붙었고, 석왕사 경내 응진전에는 '''태조 이성계가 직접 빚어 만든'''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었다. [[6.25 전쟁]] 때에 모두 박살났지만.]처럼 더욱 특별히 조선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은 곳이다. 아무리 [[유교]]적 원칙에 어긋난다고 해도, 한번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하면 단지 '왕실의 전통'이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명분을 획득하였다. "유교에 어긋나기는 하는데, 역대 국왕들도 인정하셨고 손 안 대셨잖아. 그러고도 선왕들께서 잘못하셨다고 주장하냐?" 하고 물었을 때, "잘못하셨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참고로 대놓고 선왕이 잘못했다고 지적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조광조]]이고, [[소격서]]를 결국 폐지했다. 그 선대왕은 [[세종(조선)|세종]]이다.] 아무리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선왕들의 품위를 지켜가며 공격해야 하니 논쟁에서 불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신하들, [[군약신강|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자 회암사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왕실 사찰'로 기능하는 이 거대한 [[절(불교)|절]]이, 조선 유학자들의 눈에는 그저 타도해야 마땅할 사회의 악으로 비춰졌다.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리며 회암사를 공격하였다. [[명종(조선)|명종]] 20년(1565), [[불교]]를 많이 후원한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정왕후에게 지원받으며 회암사에 거처하던 승려 [[보우(조선)|보우]]는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 죽었고, 회암사 또한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6세기에 망했음은 [[임진왜란]] 무렵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군기시가 아뢰었다. > >"각종 화포를 주조할 일을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중략)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이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져다 쓰면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도 조총을 주조하는데 주철이 부족하니, 그 군인들과 힘을 합해 실어다가 화포에 소용될 것을 제외하고 수를 헤아려 도감에 나누어 쓰면 참으로 편리하겠습니다." >---- >선조실록 [[선조(조선)|선조]] 28년(1595) 6월 4일자 두 번째 기사 즉 회암사는 1595년 이전에 폐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란기에 으레 있을 법한 [[화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폐찰된 시기가 적절히 맞아 유생들이 회암사에 방화를 하는 등 조직적으로 파괴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고 하므로 [[명종(조선)|명종]]이 금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략) 다만 금년 봄에 [[개성시|송도(松都)]]의 유생이 음사(淫祠)를 태워버린 뒤로 사방에서 그것을 본받아 [[유림|유림(儒林)]]들이 한갓 혈기의 용맹을 부려 방자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 소문을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기를, 혹은 회암사(檜巖寺)를 태우려고 한다 하며 > >(중략) > >[[대사성]]으로 하여금 [[성균관|관학]] 유생에게 알아 듣도록 타이르게 하라." >---- >명종실록 명종 21년(1566) 4월 20일자 세 번째 기사 심지어 위에 인용한 [[명종실록]]의 기록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의 의견인 "사신 왈(史臣曰)"이 있는데, "왜 밖에서 그런 소문이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해서 일을 못하게 했느냐?"라는 식이다. 즉, [[반달리즘|회암사를 조용히 불태웠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제왕은 안팎의 분별을 엄격하게 하여 말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외간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구중 궁궐 깊은 곳에 날아들어 임금의 귀를 놀라게 하고 미혹되게 하기를 이와 같이 쉽사리 하였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간사한 말이 임금의 마음을 의혹시킴으로써 마침내는 왕의 말에 욕됨을 남겼으니 또한 애석한 일이다. 회암사의 석불 유물은 대부분이 목이 잘렸다. 사용하던 그릇들도 기단 아래에서 발굴되었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릇들을 계단 아래에 버렸다는 뜻이다. 사찰이 없어져도 재건하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회암사나 [[흥왕사]]처럼 큰 사찰이 조선 시대에 재건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회암사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선왕들이 인정하신 바'라고 하면서 절에서 역대 임금의 제사를 지내게 했겠지만, 이미 불타 없어진 마당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돈을 들여 절을 재건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후대의 국왕들은 회암사를 잊어버렸고, 유학자들이 원하던 대로 [[종묘]]가 왕실의 사당으로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