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공왕 (문단 편집) === 출신 배경 ===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사냥]]을 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어떤 [[여자]][* 일단 헌강왕에게 [[후궁]]이 있었다는 것은 금석문에서도 나왔듯 확실하다. [[https://m.etoday.co.kr/view.php?idxno=1560237|수원 권씨]]라는 인물로 헌강왕 사후 그의 명복을 빌고자 [[비구니]]로 출가했다고 전한다.]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 나가 동침하여 태어났고, 궁 바깥에서 자라다가 장성하여 입궁했다. 《삼국사기》 <진성왕 본기> 를 보면 헌강왕의 [[태자]]인 효공왕이 태어난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진성여왕이 대신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고, 효공왕의 친모인 의명왕태후가 헌강왕의 정비인 의명부인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기록상 모순되는 부분이 보인다. 의명부인도 다른 [[왕비]]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있는 가계 배경에 대한 기록도 누락되어 있다는 점과 '''왕후가 아니라 왕태후로 추봉되었다는 점'''[* 일단 한 번 왕후로 봉해지면 왕태후로 변경되지는 않았다. 즉 처음부터 왕태후로 봉해졌다는 것은 왕후였던 적이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의명부인=헌강왕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효공왕의 외모에 대한 기록에는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40&totalCount=4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1r_0070_0220&position=14|三國史記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진성왕(眞聖王) 9년 10월 요를 태자로 책봉하다(0895년 10월 (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6027&cid=40942&categoryId=33380|#]] 헌강왕에게 아들은 효공왕 뿐이었지만 당시 신라의 법도상 서자가 [[왕위(동음이의어)#s-2|왕위]]를 잇는 것은 맞지 않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로 유명한 [[홍길동]]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서자와 [[적자]]는 전근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엄격하게 구분되었는데, 그 조선보다도 더 심하게 적•서를 차별하던 것이 신라와 고려이다. 당장 신라 하대의 상황에서도 여자(진성여왕)보다도 왕위 계승 서열에서 밀린 원인이 서자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때도 서자인 군보다는 왕비 소생인 [[공주]]가 서열이 높았으며, 왕비에게 아들이 없어(즉 대군이 없어서) 서자가 왕세자가 된 것이 아닌 이상 군은 꼬박꼬박 공주에게 존대를 해야 했다. 다만 《삼국사기》의 다른 단락에서는 단순히 [[나이]]가 어려 늦게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대신 동생 정강왕에 물려주었는데 정강왕마저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에 여동생인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지만 하필 세 [[남매]]가 모두 [[아들]]이 없었던 게 결정타였다. 후에 진성여왕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비록 서자라도 헌강왕의 유일한 아들이며 [[조카]]라는 점에서 895년 효공왕을 태자에 봉했고, 897년 지방 도적들의 반란이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여기며, 후삼국시대 개막의 책임을 지고 자진 [[퇴위]],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는 골품을 중요시하던 신라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였다. 동시대 [[중국]]의 경우, 비록 궁인 출신 후궁의 [[몸]]에서 났을지라도 [[황제]]의 자식이라면 계승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신라에서는 오직 정실 [[왕후]]의 소생만이 계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신라에서 서자의 계승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부분은 조선에서 여성의 계승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과는 정반대다. 고려는 왕후를 여러 명 들이는 방법으로 서자와 여성의 계승을 모두 금지했다. (조선의 경우 왕후는 1명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후궁이었다.)]. 더욱이 효공왕의 신분은 그 출생 설화상 서자도 아닌 [[사생아]] 신분에 가까웠다. 진성여왕 재위 후반부에 이미 서라벌 사람들조차도 진성여왕과 [[김위홍]]을 은어로 비난할 정도로 경문왕계 왕가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어 있었고, 그런 와중에 혈통상 약점을 가지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데다 재위 내내 [[박예겸]], [[신덕왕|박경휘]](제53대 신덕왕)를 위시로 한 [[박(성씨)|박씨]] 족단의 위세에 휘둘린 점을 봤을 때 진성여왕이 [[양위]]를 결정한 시점에서 이미 박씨로의 왕위 이양은 기정사실화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골]]에서 [[태종 무열왕]]계로 이양할 때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계에서 [[내물 마립간|내물왕]]계로 이양할 때 [[선덕왕]]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던 것처럼 내물왕계에서 [[아달라 이사금|아달라왕]]계로 이양할 때 효공왕이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