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명세자 (문단 편집) === [[대리청정]] === >[[순조|내]]가 [[1811년|신미년]] 이후부터는 [[요양|정섭(靜攝)하는 중에 있던 때]]가 많았고, 비록 혹 약간 편안하다고는 하나 때로는 항상 기무(機務)에 정체(停滯)됨이 많았으니, 국인(國人)이 근심하는 것은 곧 내가 스스로 근심하는 바이다. [[효명세자|세자]]는 총명(聰明)하고 영리(怜悧)하며 나이가 점차 장성하여 가니 요즘 시좌(侍坐, 참관)하거나 [[섭정|섭향(攝享)]]하게 하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멀리는 [[당나라]]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조선/왕사|열성조]](列聖祖)의 [[대리청정]](代理聽政)하는 일을 본받아 내 마음이 이미 정하여졌다. 한편으로는 노고(勞苦)를 분담하여 조양(調養)을 편하게 하는 것을 돕게 하고, 한편으로는 밝게 익혀서 치도(治道)를 통달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종묘|종]][[사직|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다. 조정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에 대계(大計)를 고하니, [[왕세자]]의 [[대리청정|청정]](廳政)은 한결같이 [[1775년|을미년]]의 절목(節目)[* [[정조(조선)|정조]]가 세손시절에 [[1775년]](영조 51년), [[대리청정]]을 하던 선례를 말한다.]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 >- '''《[[순조실록]]》 28권, [[1827년]](순조 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3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wa_12702009_003|#]].] [[순조]]의 [[건강]]이 날로 나빠지자 [[1827년]](순조 27년) 2월,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廳政)'''을 명했고, 이후 4년간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직접 국사를 주관하였다. [[순조|왕]]이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자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을 정도로 매우 기대받았다. 과거에는 [[조선/왕사|임금]]이 [[조선/역대 왕세자|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 신하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서 [[대리청정]]하라는 전교를 걷어달라고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종(조선)|세종]]이 [[문종(조선)|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하들이 반대했는데 [[세종(조선)|세종]]이 "아파 죽겠다"고 일갈하고 나서야 간신히 집행될 수 있었다. [[숙종(조선)|숙종]] 때는 [[조선/역대 왕세자|세자]]인 [[경종(조선)|경종]]에게 [[대리청정]]이 명해지자 [[소론]]에서는 윤지완 등이 [[도끼]] [[상소]]까지 하며 반대하는 등 분위기가 너무 험악했었다.[* [[경종(조선)|경종]]을 [[폐서인|폐세자]]하려던 [[노론]]은 오히려 좋아하였다.] [[영조]]가 [[왕세손|세손]] [[정조(조선)|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정조(조선)|세손]]의 반대파 [[홍인한]],[* 근데 이 사람은 [[정조(조선)|세손]]의 작은 외할아버지이다.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이복동생. 자기 형의 외손자를 반대한 것.] [[정후겸]]은 물론 김상철, 한익모 등 당시의 대신들이 모조리 들고 일어나 결사 반대했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때는 남공철, 김재찬, 한용귀, 김사목, 이상황, 심상규 등 당시의 중신들이 전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비망기(왕의 서무 명령)를 그야말로 찬양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표현될 정도였다.[* "신(臣) 등은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여서, 내려온 비망기를 삼가 보고는, '''기뻐서 발을 구르고 춤추면서 앙달(仰達, 우러러 여쭘)할 바를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 '''《[[순조실록]]》 28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2월 9일 (을묘)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702009_004|#]].] 이에 효명세자는 이전의 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의례적으로 몇 차례 거절을 했으나[* [[대리청정]]이나 [[양위]] 등 민감한 사안은 자칫 '불충(不忠)' 문제로 걸고 넘어지거나 심하면 [[역모]]죄로도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하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사안이라고 해도 자신은 [[권력]]에 뜻이 없다는 식으로 한두 번은 [[석고대죄]]를 하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미덕이자 의무였으며, [[조선]]의 [[조선/왕사|많은 왕들]]이 이걸 가지고 소위 '충성심 테스트' 내지는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기도 했다.[* 이런식으로 충성심 테스트과 함께 권력 기강을 잡기 위해서 [[아버지]]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선/역대 왕세자|세자]]를 [[아들]]이 아닌 '''[[조선/왕사|왕위]]에 대한 도전하는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늘 괴롭히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태종(조선)|태종]], [[선조(조선)|선조]], [[영조]] 등이 있다.] 위에서 신하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는, 신하들도 적극 반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불충 문제로 곤욕을 치룰 수 있었기 때문.] 아버지 [[순조]]는 [[대리청정]]으로 [[장난]]치려는 게 아닌 정말로 진심이었고 전폭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빠르게 [[대리청정]]이 아들 효명세자에 의해 시행되었다. 효명세자는 20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일처리로 조정의 공직 기강을 잡았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 아버지 [[순조]] 통치 시기는 [[순조]]가 잦은 병환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져 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 실록 기사를 보면 직전까지와는 다르게 파직, 탄핵, 유배, 국문, 해임 등의 처벌과 관직 제수 및 시상 등 상벌과 관련된 기사가 쏟아진다. 관리들을 감시하고 부정부패를 감독해야 할 [[순조|왕]]이 정무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 내부의 여러 곳들이 고여서 썩어있었던 것. 효명세자는 "어느 [[수령]]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소리가 들리자 엄한 벌을 내리며 철저히 단속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정승]]도 직급의 상하고하를 막론하고 직접 제수하여 단순히 [[권한대행]]을 넘어서 인사권 문제도 다루는 등 실질적인 [[조선/왕사|군주]]의 역할을 도맡아 진행했는데 이 때 기용된 인물 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실학자 [[박지원(실학자)|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시조로 불리는 [[박규수]]다. [[순조]]는 이러한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월권]]이라고 언짢아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조선/역대 왕세자|세자]]를 지원하면서 뒤에서 힘을 바짝 실어줬다.[* 이러한 점은 [[순조]]와 증조부인 [[영조]]가 극명히 차이를 보인다. [[영조]]의 사례를 보자면,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뭐라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월권]]이랍시고 신하들 앞에서 대놓고 아들을 흉보고, 또 언제는 국사를 논할 때 자신에게 물어봤다고 그거 하나 결단치 못한다고 크게 면박을 주는 등 [[대리청정]]하는 [[사도세자|세자]]에게 기대는커녕 다 세자 탓이라고 일삼았다. 애초에 [[영조]]는 [[순조]]와 달리 진심으로 [[대리청정]]을 맡기려던 게 아니라 아들을 테스트해보고 대놓고 면박을 주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 정치적 [[파벌]]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순조]]도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대리청정]]을 실시했던 게 아니라,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아들에게 전적으로 믿고 맡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효명세자도 이에 질세라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표현하고 아버지 [[순조]]의 권위를 드높이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순조]]의 '탄신 진연(誕身陳延)' 등의 주요 연회들을 [[조선]] [[조선/왕실|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과 더불어 성대하게 개최했다. 이 연회들의 핵심에는 '정재'라고 불리는 궁중 [[무용]]이 있었는데 효명세자는 정재의 대부분을 직접 수정하거나 다듬는 등 [[예술]]에도 더욱 재능을 드러냈다. 그래서 효명세자를 직접 [[발레]] 공연에까지도 나섰던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견주어 '[[조선]]의 태양왕(太陽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검무(劒武)에 쓰이는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노는 독특한 구조의 칼을 도입한 사람도 바로 효명세자. 이처럼 아버지 [[순조]]와 아들 효명세자의 관계는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격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리청정]] 시기에도 전혀 잡음이 나오지 않았으며, 부자 간의 돈독한 관계 덕분에 조정에도 모처럼 활력이 찾아오는 듯 했다. 그러나 잘될 것만 같았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얼마 가지 않아 너무나도 허망하게 [[요절|끝나버리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