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명세자 (문단 편집) === [[참척|이른 죽음]] === 아버지 [[순조]]와 여럿 신하들의 여러 기대 속에 [[대리청정]]을 잘 하던 효명세자는 갑자기 병에 걸렸고 불과 22살의 젊디 젊은 나이로 [[1830년]](순조 30년) [[음력|음]][[5월 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5월 6일 (임술) 3번째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wa_13005006_003|#]].] [[이덕일]]은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의 [[독살]]설을 제기했지만, 이 사람이 제기한 수많은 독살설이 그렇듯 근거는 전혀 없다. [[이덕일]]이 퍼뜨린 인식과 달리 세자가 [[대리청정]] 기간 동안 [[세도 정치|세도]]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가문]]간 싸움을 회피했던 [[김조순]]([[1832년]] 卒)이 아직 살아있었으며 각혈(刻血) 후 [[어의]]들이 갖은 방도를 쓰다가 재야에 있던 [[정약용]][* 근데 이 사람은 [[효명세자]]의 부친 [[순조]]--의 대리자라는 탈을 쓴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었다.]까지 부르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인지 [[과로]]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워낙 창창한 나이에 급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옥당]], 춘방 등에서 [[조선/역대 왕세자|왕세자]]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사망]] 원인을 정확히 조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순조]]는 자식의 죽음으로 슬픈 마당에 그런 일까지 벌이고 싶지 않았는지 거절한다. [[순조]]는 아내 [[순원왕후]]와 더불어 아들 효명세자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는데, 다음은 [[순조]]가 친히 직접 쓴 '지문(誌文)'과 '제문(諸文)'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한(恨)이 절절이 느껴진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효명세자 지문(孝明世子誌文)》''' >---- >경인(庚寅, [[1830년]]) 5월 6일 임술일에 왕세자가 병으로 >[[창덕궁 희정당|희정당]]의 서협실(西夾室)에서 [[사망|훙서]]하였으니, 춘추가 22세였다. > >[[순조|성상]](聖上) 및 [[순원왕후|왕비]]가 통곡하고 운절하면서 하늘에 호소하였으나 어쩔 길이 없었으며, >경사대부(卿士大夫)와 진신장보(搢紳章甫)[* 모든 벼슬아치와 유생을 의미함.]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울먹이며 서로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기를, >‘하늘이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가? >저성(儲聖, [[효명세자|세자]])이 돌아갔으니,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 >궁중의 위사(衛史)와 모든 부서의 관료들이며 도성에 가득한 군인과 백성, 천한 이들, >부녀자와 아이들도 모두 머리를 들고 애처롭게 울기를, > >‘우리 [[순조|양]][[순원왕후|성]](兩聖)의 인자함과 성덕(盛德)으로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며칠 사이에 슬퍼하며 원통해 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사무쳤다.}}}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효명세자 제문(孝明世子諸文)》''' >----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 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옥황상제|상제(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조선|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德)스럽지 못하여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왕세자|윤사(胤嗣)]]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怨亡)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哭)을 하려고 하면 목이 먼저 메니, 천하(天下)와 고금(古今)에 혹시라도 [[조선왕조|국가]]를 소유(燒有, 즉위)하고서 나의 정경(情景)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내가 눈으로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귀로 네 음성(音聖, 목소리)을 듣지 못한 지 이미 60일이 지나고 두 절서(節序, 계절)가 바뀌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잠이 들어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이 명명(冥冥)하고 막막(漠漠)하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련하여 참으면서 먹고 호흡(呼吸)하기를 태연히 하며 유유범범(悠悠泛泛)하게 여겨서인가. 네가 정말로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내가 과연 바야흐로 꿈을 꾸면서 깨지 않고 있는가. 네가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는가, 아니면 [[부활|네가 장차 벌떡 일어나 돌아올 것인가.]] [[순조|부]][[순원왕후|모]](父母)·[[신정왕후 조씨|처]][[헌종(조선)|자]](妻子)의 은혜가 여기에 있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의 중대함이 여기에 있으며 성궐(城闕)과 궁전(宮殿)의 거처가 여기에 있는데, 가기는 어디로 가며 가서는 누구와 친할 것인가. 해와 달은 그 운행(運行)이 변함이 없고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그 까닭도 변함이 없으며, 하늘은 높고 땅이 두터운 그 지극함도 변함이 없는데, 돌아온다는 기약은 언제이며 기약은 누구와 같이 알겠는가. 천하의 슬픔 가운데 어버이와 떨어져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네가 성효(誠孝)하면서 3년 동안 [[순조|어버이]] 품에서 사랑받은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어찌 이와 같이 근심(謹心)이 없을 수 있겠으며, 천하의 슬픔 가운데 자식이 없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는데, 나의 기구하고 험한 운명으로 갑자기 네 가지 곤궁(困躬)한 것에서 첫 번째 입장이 되었으니, 어찌 이와 같이 독(毒)하게 하는가. 슬프고 더 슬프다. > >옛날 [[순조|내가]] [[1800년|10살 겨우 넘어서]] [[정조(조선)|황고(皇考)]]를 여의었는데 [[조선|어렵고 큰 기업(基業)]]이 산처럼 자신을 누르는 듯하였으며 자신의 외로움과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였지만, 1년, 2년 지나면서 많은 백성들 위에서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무엇이 있어서이겠는가. 특별히 [[옥황상제|황천]](皇天)과 [[조선/왕사|조종]](祖宗)께서 말없이 도와주신 힘뿐이었다. 그러다가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마음에 즐거움은 남의 아비가 되는 데에 그칠 뿐만이 아니고 [[왕세자|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져 [[태조(조선)|황고]](皇考)와 [[조선/왕사|열성]](列聖)의 유업(遺業)을 의뢰하여 펼칠 수 있어서였다. 네가 또 이미 [[성인식|관례]](冠禮)를 치르고 이미 [[결혼|장가]]를 들어 또한 이미 자식을 두었는데, 어질고 효성(孝性)스러우며 총명(聰明)하고 타고난 자질이 일찍 성취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내가 하던 정치를 [[대리청정|섭행]](攝行)하게 하였더니, 팔방(八方)에서 (백성들이) 목을 빼어 ‘은(殷)나라 때의 치도(治道)를 다시 창성(昌誠)하게 할 수 있으며, 주(周)나라 때의 천명(天命)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들 하였으니, 어찌 나 한 마음의 즐거움이며 한 몸의 경사(慶事)라고 말하겠는가. 자못 천하 국가에서 드물게 있고 드물게 보는 일이었기에 내가 망령(妄靈)되이 근심(謹心)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었었는데, 하루아침에 [[죽음|재앙]](災殃)을 내려 만사(萬事)가 기왓장처럼 깨어질 줄을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멸망|종팽]](宗祊)에 대한 우려와 나 자신에 대한 슬픔이 도리어 [[정조(조선)|황고(皇考)]]를 여의고 [[효명세자|네]]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심함이 있다고나 할까. 슬프고 슬프다. > >너의 청명(淸明)하고 수미(秀美)한 자질과 길선(吉善)하고 상화(祥和)한 기질은 하늘에서 태어나게 한 바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꺾어버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위급한 병(病)에 걸린 데다 또 괴잡(乖雜)한 증세가 겹쳐 물이 흘러간 구덩이 같고 불에 타고 남은 재와 같으니, 이치의 믿기 어려움이 어찌 더 갑작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빨랐는가. 어떻게 이른바 [[적장자|비자]](丕子)[* 임금의 적장자(嫡長子).]의 책임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인가. 진실인가 거짓인가. 누구를 좇아서 바로잡겠으며, 귀신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누가 이를 주장하는가. 슬프고 슬프다. 고고(呱呱)하게 우는 [[헌종(조선)|세손(世孫)]]이 장차 [[순조|할아버지]]를 [[효명세자|아비]]같이 여길 터이며, 근심스러운 나의 여생은 장차 [[조선|나라]]를 운명(運命)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네가 혹시라도 앎이 있다면 나의 이 말을 듣고서 틀림없이 [[저승]]과 [[이승]] 사이에서 얼굴을 가리고 억울(抑鬱)해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슬픔은 너로 인한 슬픔일 뿐만이 아니고 [[순조|나]]의 어질지 못하고 덕(德)스럽지 못하여 죄를 자신에게 쌓아 나의 훌륭한 자식을 잘 보전(保傳)하지 못하여 4백 년의 [[종묘]][[사직]]으로 하여금 위태롭기가 하나의 털끝 같지만 어떻게 할 수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아! 애통하도다.}}} || 안 그래도 이미 중전 [[순원왕후]] 소생의 [[왕자]][* 효명세자의 친동생으로 [[대군]](大君)에 봉해지기 전에 [[요절]]했다.]와 [[후궁]] 소생의 [[영온옹주]][* [[순조]]의 유일한 서녀로, 어릴 때부터 몸이 불편하여 [[실어증|말을 못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굉장히 아낀 여동생이었다.]가 죽었던터라 순조의 병은 깊어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2년 후 두 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까지 자신보다 먼저 [[요절]]하자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2년 뒤인 [[1834년]](순조 34년), 세상을 뜨게 된다. 훗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조선)|헌종]]까지 요절하면서 [[정조(조선)|정조]]로부터 이어진 [[직계]][[혈통]]은 사실상 단절되고 만다. 그나마 [[사도세자]]의 자손인 [[철종(조선)|철종]]이 [[순조]]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입승대통''')하여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 죽으면서 [[효종(조선)|효종]]으로부터 이어진 모든 [[혈통]]이 완전히 단절되고 그의 양자로 지정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고종(대한제국)|고종]]은 [[법|법적]]으로는 [[사도세자]]의 [[후손]]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무려 선왕 [[철종(조선)|철종]]과는 '''17촌'''의 차이가 난다. [[추존]](追尊) '''[[문조(묘호)|문조]](文祖)''', 문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내에 동원이강릉 형식의 '수릉(綏陵)'. 본래 효명세자는 죽고 나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조선)|경종]]의 [[의릉]](懿陵) 왼쪽 언덕 언저리에 장사 지냈었지만, [[풍수지리|풍수]]에 관한 논의가 있어서 [[철종(조선)|철종]] 때인 [[1855년]](철종 6년)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했으며 [[1890년]](고종 27년) 4월, [[대왕대비]]였던 아내 [[신정왕후 조씨]]가 [[승하]]하자 함께 합장(合葬)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구릉]]을 방문하면 팸플릿([[지도]] 약도)을 하나 주는데 팸플릿에 적혀 있는 추천 관람 코스대로 [[동구릉]]을 관람하게 되면 가장 먼저 보는 능이 수릉이다. 사실 [[동구릉]]은 팸플릿의 추천 코스대로 수릉부터 걸어가서 관람하는게 오히려 집에 돌아갈 때 편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