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문제 (문단 편집) ==== 정책 목록 ==== * 호한(胡漢) 간 결혼 장려 - 효문제 본인 자신도 혼혈이었다. 모계인 풍태후가 한족이었다. *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 - 북위 황실도 씨족명을 [[탁발]](拓跋)에서 한성인 [[원(성씨)|원]](元)으로 고쳤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으며, 결국 [[북주]] 제3대 고조 무제 [[우문옹]]의 치세때 이르러 한성으로 개변하던 것을 다시 호성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시했다.('''호화정책''') * 호속(胡俗)과 호어(胡語) 금지 - 선비족의 고유어와 고유 풍속을 금지하고, 한어와 한족의 풍속을 따르게 했다. 다만 이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 성족분정(姓族分定) - 씨족이 다르면 다르게 살게 했다. 이는 씨족연맹을 형성하여 황권에 도전하려는 것을 방지하려는 중앙집권화정책이기도 했다. * 서교 제천 금지 - 서교 제천은 선비족 고유의 제천의식이었다. 선비족은 한족과는 다른 고유의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효문제는 이런 고유 신앙을 금지했다. 또한 공자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이는 국교를 [[유교]]로 바꾼 것이었다.[* 하지만 북조는 이후 유교 못지않게 불교의 영향도 강하게 받게 된다.] * 관제 개혁 - 원래 선비족을 비롯한 유목민들은 부족국가체제이기 때문에 부족장의 대표에 불과했던 황제는 권한이 미약했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중국(한족)은 전통적으로 황권이 엄청나게 강했고, 투입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므로 선비족이 한족을 모방함에 따라서 황권이 엄청나게 신장되었다. 그리하여 북조가 중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효문제는 직접 농사를 시범삼아 지어서 유목생활을 하던 선비족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화정책은 결과적으로 선비족을 한화 선비와 비한화 선비로 나누는 결과를 낳았고, 낙양 천도로 인해 황제를 따라 이동한 한화 선비족은 중앙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천도를 반대하며 원래 있던 곳에 남아있었던 비한화 선비족은 그만큼 입지를 잃게 되었다. 이와 함께 효문제의 치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문성문명황후 섭정하에 실시된 삼장제와 균전제의 실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