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문제 (문단 편집) ==== 한화정책의 결과 ==== 이런 한화정책은 단순히 5호 16국시대 이전의 한족 풍습을 복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발달시킨 것이었다. 중국식 고대국가의 완성형이라고 볼 수 있는 당나라의 제도 또한 북위 효문제의 제도에 뿌리가 닿아 있을 정도로, 효문제의 개혁은 철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화정책의 결과 황제권은 강화되었고, 국가체제는 정비되었다. 하지만 단기적, 장기적으로는 이런 개혁에 동반되는 보•혁 간의 갈등이 일어났다. 한족의 등용이 늘어나고, 문인을 우대하는 풍토가 일어나자 소외된 무장들과 비한화된 선비족 내 족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496년 실제로 효문제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원순(元恂)이 부황의 한화정책에 반발해 옛 수도였던 [[평성]](平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되었다. 진압 후 효문제는 원순을 폐태자시키고 주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고, 499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효문제가 붕어한 후 누적된 불만은 523년 '''[[육진의 난|육진의 대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이런 한화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지배층인 선비족 내에서 한화 정책파와 전통 고수파와의 상당한 갈등이 있게 되었고, 이것이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5호가 중심이 된 북조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이런 한화정책을 지속했으며, 이런 정책에 따르는 보혁갈등으로 [[육진의 난|정]][[동위|치]][[서위|적]] [[북제|변]][[북주|란]]은 있었지만 개혁이 효과를 보면서 정치가 안정되자 더욱 부강해졌다. 결국 수나라 고조 [[문제(수)|문제 양견]]의 치세때 남조의 [[진(남조)|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유일한 패자가 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