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민제 (문단 편집) == 생애 == 542년, [[서위]](西魏)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와 문황후 원씨(북위 [[효무제(북위)|효무제]]의 여동생)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우문태의 3남이었지만, 그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장남 [[명제(북주)|우문육]](宇文毓)은 첩 요씨(姚氏)의 소생이었고, 차남 우문진은 요절했기 때문에 정실 소생이었던 그가 후계자가 되었다. 《[[주서]]》(周書)에 따르면 우문각은 강하고, 과감한 성격이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우문태의 조카이자 우문각의 사촌 형인 [[우문호]](宇文護)에게 우문태는 실권을 맡겼다. 556년, 아버지 우문태가 죽고, 557년에 우문호는 공제를 시켜 우문각에게 [[선양]]하도록 했다. 이로써 서위가 멸망하고 북주(北周)가 건국되었다. 우문각은 [[천왕]](天王)에 등극했다. 하지만 15세에 불과해 실권은 우문호가 가지고 있었다. 우문호는 초기에는 아들(우문각)을 잘 보좌해달라는 숙부 우문태의 유언을 지켰지만, 날이 갈수록 사촌동생인 우문각을 무시하고 전횡을 휘둘렀다. 고위 관료였던 조귀(趙貴)와 독고신(獨孤信)은 이를 불편히 여겨 우문호를 죽이려 했으나 [[역관광]]당해 오히려 우문호에게 주살되었다. 천왕 우문각도 우문호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 싶어했기 때문에 자기 심복들인 이식(李植), 손항(孫恆), 을불봉(乙弗鳳), 하발제(賀拔提) 등과 모의해 사촌형 우문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광락(張光洛)이 이를 우문호에게 이야기했고 우문호는 곧 우문각을 폐위시켜 약양공(略陽公)으로 강등한 후에 살해했다. 뒷날 동생 [[무제(북주)|우문옹]](宇文邕)이 우문호를 제거하자('''천화정변''', 572. 3) 복권되어 효민황제(孝閔皇帝)로 추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