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원제 (문단 편집) === 재위 === 11월, 소역은 강릉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폐허가 된 수도 건강 대신에 자신의 근거지 강릉으로 천도했다. 그는 강릉을 건강을 모델로 그대로 개축했는데 성벽의 표격, 대전, 성문 이름까지 모두 건강과 같았다. 그는 효성이 지극해 아버지가 죽은 정전에서 일을 보지 않고, 용광전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승성 2년(553년) 3월, [[서위]](西魏)의 사신을 접견했다. 하지만 대우가 북제의 사신보다 못하다는 구실로 서위의 [[승상]]이자 권력자였던 [[우문태]]는 불만을 품었다. 이를 구실로 살해당한 소예의 동생이었던 옹주 자사 소찰의 지지와 지원하에 50,000명을 출병시켜 원제 소역을 공격했다. 소역의 조카뻘이었던 소찰은 강릉과 가까운 요충지 [[양양]]을 서위에게 스스로 바치고, 서위군과 함께 [[형주]] 강릉을 공격해왔다. 소역은 진양문에서 열병하고 비파문으로 친히 나가 항전하였다. 승성 3년(554년) 11월,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소역은 절망하며 '''"10,000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 소역이 모두 정성들여 수집한 것으로 이 때 영원히 소실된 책들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내성으로 퇴각했다. 이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 심하고 [[항우]]의 [[셴양시|함양]] 파괴[* 의외로 분서갱유의 피해는 심하지 않았다. 책을 수거하거나 불태웠어도 수거한 책은 함양에 학자들 연구 및 열람용으로 보관해주었는데, 문제는 나중에 항우가 함양을 통째로 불태워버렸다.]에 비견할 만하다.''' 결국 12월, 내성마저 함락되면서 사로잡혀 궁중 주의고에 구금되었다가 머지않아 소찰의 지시에 의해 결국 피살되었다{승성 3년(554년) 12월 19일, 555년 1월 27일}. 소찰은 천으로 그의 몸을 감아 부들돗자리에 싸고 흰 띠로 묶어 강릉 진양문 밖에 매장했으며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47세였다. 황제 임에도 불구하고 천으로 싸인 돗자리로 감싸 매장된 것은 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