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정왕후 (문단 편집) == 여담 == * 1844년([[헌종(조선)|헌종]] 10년) 5월 효정왕후를 간택하던 날,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던 [[순조]]의 적3녀 [[덕온공주]][* 이복언니 [[영온옹주]]를 포함하면 넷째 딸.]가 경사를 치르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에 들어갔다가 [[점심]]으로 먹은 [[비빔밥]]이 [[급체]]하여 사망하는 참변이 발생했다.[* 현재는 [[급체]]가 심각한 질병이 아니나, 당시엔 급체로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덕온공주는 죽기 직전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곧바로 사망했고, 공주 역시 아이를 매장한 지 약 2시간 정도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 어진 성품을 갖고 처첩 간에 우애있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41년 3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정미년(1847)에 경빈(慶嬪)이 입궁(入宮)하여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태후는 더욱 화색이 넘쳐 근시(近侍)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경빈의 자태에 아름다움이 넘치고 덕스러운 얼굴에 그윽한 빛이 도니 나라에 왕자가 많아지는 경사가 생기고 후손들이 백 대에 이르도록 번창해질 것이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내가 더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그러자 순원 성모(純元聖母)가 듣고서 칭찬하기를, ‘왕후(王后)가 이처럼 어지니 태임(太任), 태사(太姒)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근간에 경빈(慶嬪)이 본궁(本宮)에 나가서 살며 명절을 축하하는 이외에 혹 이따금 대궐에 들어와 살 때면 태후는 기뻐하며 옛일을 이야기하느라 저녁이 되어도 싫증을 몰랐으며 막상 그가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하면 그리운 심정을 금치 못해 눈물을 뿌리며 보냈다. 색다른 음식이나 맛난 과일이 생기면 아무리 적더라도 반드시 나눠주어 먹였다. > 선왕(先王)에게서 은총을 받은 궁인(宮人)에 대해서는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고 보살펴 주었는데 그 사랑은 갈수록 지극하였다. 이것은 모두 태후의 성대한 덕이며 역대 왕후나 왕비들에게서는 드문 것이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덕온공주, version=41, paragraph=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