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정제 (문단 편집) == 꼭두각시 황제 == 효정제 자신은 시와 부를 읊고, 돌사자를 든채 담장을 넘는 등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으나 현실은 고환의 전횡이 계속되면서 동위의 정권은 모두 발해 고씨들의 손안에 있었고, 효정제는 고씨 일족의 꼭두각시 황제에 불과했다. 그나마 고환은 효무제의 도망으로 '''협천자이령제후'''(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을 내림)를 할 유리할 조건을 놓친 경험이 있어서 겉으로나마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감히 권력을 독점하지 않았으며 연회에서는 부복을 하고 축수를 했다. 효정제가 법회를 열고 수레를 탄채 향불을 피우면서 가면 고환은 향로를 받쳐들고 도보로 그의 뒤를 따르니 고환의 부하들 역시 공손하여 효정제에게 황제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547년, 고환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장남 [[고징]]은 오만무례하여 아예 대놓고 '''어리석은 자'''로 칭할 만큼 효정제를 무시했다. 우선 심복인 최계서를 시켜 효정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했다. > "어리석은 사람이 다시 어떠할 것 같은가? 어리석은 기색이 조금 차이가 있는가? 응당 마음을 써 자세히 조사하라." 고징이 최계서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아예 어리석은 자라고 표현할 정도로 효정제를 우습게 봤다. 하루는 효정제가 [[사냥]]을 나섰다가 흥이 올라 나는듯이 말을 몰았다. 그러자 그의 수행원이 큰 소리로 만류했다. > "[[폐하]], 그렇게 빨리 달리다가는 대장군께서 화내십니다." 효정제는 하다못해 말 달리는 속도마저도 고징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아마도 자기가 한 짓이 있어서 효무제처럼 효정제도 달아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징은 자주 황제의 연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한번은 시종에게 가장 큰 술잔을 가져오게 하여 술을 가득 채우더니 효정제에게 말했다. > "폐하, [[건배]]하시지요!" 이는 도저히 대신이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말투라고는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친구]]와 술잔을 주고받는 듯 했다. 그러자 하도 어이가 없었던 효정제가 한탄했다. > [[효정제]]: "[[짐]]이 이렇게 살아 뭣하겠는가?" > 고징: "뭐? 짐? 짐? 무슨 [[개]][[다리(신체)|다리]]짐이냐?" 고징은 최계서를 시켜 효정제를 주먹으로 3번 [[구타]]하게한 후 옷을 떨치며 나갔다. 다음날 고징은 효정제에게 사죄했으나, 효정제는 괜찮다며 [[비단]] 100필을 주고 무마시켰다. 하지만 효정제는 서럽고 분해서 시강(侍講) 순제(荀濟)[* 자는 자통(子通)이고, 본관은 영천군이며 [[순황]]의 후손이다. [[영가의 난]]때 [[宗族|겨레]]가 강남으로 피난을 가서 대대로 객가인처럼 살았으며, [[양무제]]의 벗이었으나 주이의 밀고 때문에 나중에 [[동위]]에 투항했다.], 사부랑중(祠部郞中)[* 사부는 [[예부]]의 옛 이름이며 낭중은 참의에 해당한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예조참의이다.] 원근(元瑾)[* 효정제의 11촌 황야(皇爺. 황제의 할아버지뻘 [[황족]])이다. 계보는 [[탁발도|세조 태무황제]] - 광양간왕(廣陽簡王) 원건(元建, 선비어 이름은 탁발수락진 拓跋樹洛眞) - 광양의렬왕(廣陽懿烈王) 원가(元嘉) - 광양충무왕(廣陽忠武王) 원연(元淵) - 원근이다.], 화산왕(華山王) 원대기(元大器)[* 효정제의 19촌 현조부뻘 되는 황족이다. 계보는 [[도무제]]의 종조부 고량신무왕(高涼神武王) 원고(元孤) - 고량평양왕(高涼平陽王) 원근(元斤) - 고량양왕(高涼襄王) 원낙진(元樂眞)[* 선비어 이름은 탁발보락진(拓跋步洛眞)] - 양읍자(襄邑子) 원능(元陵)[* 선비어 이름은 탁발가실릉(拓跋可悉陵)] - 기주자사 원굉(元肱) - 화산무왕(華山武王) 원지(元鷙)[* [[자(이름)|자]]는 [[공작(조류)|공작]]. 자는 이름과 말미있게 짓는데 이름의 뜻이 '사나운 새'임을 생각하면 '공작'이란 자는 의도한 것이다.] - 원대기이다.][* 동양 사서에선 원래 [[황족]]이나 [[왕족]]은 작위명 뒤에 이름이 올 때 성을 생략하지만 현대어에선 다 있는 편이 알아보기 쉬우므로 전부 기재했다.] 등과 모의하여 고징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패했고 고징이 화가 나 효정제에게 따졌다. > 고징: "폐하는 어찌 반역할 뜻을 가지셨습니까? 신 부자의 공으로 [[사직#s-2|사직]]이 있게 되었는데 폐하에게 무슨 죄를 지었던 말입니까? 이는 필시 좌우의 비빈(妃嬪)들이 한 짓일 것입니다." > 효정제: "옛날부터 오직 신하가 군주를 배반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군주가 신하를 배반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왕]](고징)[* 발해왕이었다.]이 스스로 배반하고자 하면서 어찌 나[* 원문에 짐(朕)이 아니라 我(나)라고 나와 있다. 아마 고징에게 짐이라고 했다가 얻어 맞은 것 때문에 무서웠던 모양이다.]에게 책임을 지우는가? 내가 왕을 살해하면 사직이 안정되고 살해하지 않으면 망해 없어지는 것이 며칠 없으니 내 몸도 아낄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비빈의 경우에야! 반드시 시역하고자 한다면 늦추든가, 빨리 하든가 하는 건 왕에게 달려 있다." 고징은 3일 뒤 효정제를 함장당에 유폐하고, 순제 등 관련된 신하들을 죽였다. 《[[자치통감]]》에는 [[팽형]]에 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마침 음식을 나르는 [[노비]]인 난경[* 남조 [[소량]]의 서주자사 난흠의 아들로 포로가 되어 노비로 전락했다. 아버지 난흠이 제물을 주며 석방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에게 고징이 암살당하면서, 효정제는 드디어 황제 노릇을 해보나 싶었는데, 고환의 차남이었던 [[고양(북제)|고양]]이 권력을 빠르게 장악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효정제는 결국 고양에게 [[선양]]을 해서 목숨이라도 건지려고 했고, 고양은 550년 효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동위를 멸망시키고 [[북제]](北齊)를 건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