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현순황후 (문단 편집) == 죽음 == 황2자 영련이 죽은 후, 어렵게 임신하여 황7자 영종을 낳았다. 그러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종이 천연두로 사망하여 효현순황후가 크게 상심하게 된다. 연이어 자식들이 사망하자 효현순황후는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다. 궁궐 내 점술가들마저 "황후가 황궁 안에서 은둔한다면 앞으로 또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건륭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그녀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함께 떠나는 산동성 여행을 기획하고 동순을 떠났다. 황후도 산동성을 여행하면서 몸이 좋아지기는 했으나 제남에서 감기에 걸린 후 상태가 악화되었다.[* 뱃놀이를 하던 중에 물에 빠졌다거나 건륭이 바람나서 물에 빠졌다는 등의 이야기는 모두 야사이다.] 3월 25일 경산 관덕전으로 시신이 안치되었으며 3월 25일 건륭이 친히 "효현(孝賢)"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건륭제는 크게 슬퍼하였고 나중에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어 지금 당장 황후 일행이 탔던 배를 통째로 [[자금성]]에 옮겨놓으라고 명령하는가 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관리들과 기술자들이 고민 끝에 방법을 고안하여 결국 성공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조의를 제대로 표하지 않은 대신들을 강등하거나, 파면했다. 그중에는 참감후(사형 집행 유예)에 처해진 사람까지 있었다. [[건륭제]]의 황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황장자 영황(永璜)과 황3자 영장(永璋)은 그녀에 대해 '''애석함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건륭제로부터 '''"최악의 범죄자"''' 라고 일갈을 들었고, 처벌을 받았으며 황태자 후보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기점으로 건륭제는 성격까지 바뀌어 ~~과연 정말 황후 때문에 성격이 '바뀐'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상당히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기질을 자주 보여주기 시작했다. 황후가 사망하면서 육궁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의 황태후는 황귀비를 책봉하라고 하였고 건륭제는 당시 한귀비였던 [[계후 호이파나라씨|계황후]]를 황귀비로 올렸다. [[계후 호이파나라씨|계황후]]는 효현순황후의 장례가 끝난 후에 황후로 책봉되었고, 황후에 오른 지 1년 반 만에 황12자를 낳았다. 이후 건륭제는 죽을 때까지 효현순황후를 절절하게 그리워했고, 그녀의 무덤에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에 대한 추억에 스스로 더 깊이 빠져들어, 틈만 나면 그녀의 일화를 얘기하며 그녀를 칭송했으며,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를 수없이 썼다.~~[[순원황후|이거 왠지...]]~~ ~~원래 청대 황제들은 한 여자한테 집착이 심하다~~ 참고로, 건륭제가 그녀를 위해 쓴 시는 100편이 넘었다.[[https://books.google.co.kr/books?id=16MMDQAAQBAJ&pg=PT151&lpg=PT151&dq=%ED%9A%A8%ED%98%84%EC%88%9C%ED%99%A9%ED%9B%84&source=bl&ots=2NHLdzJ7Aq&sig=sqVBpfCOjOhEp4Jfyj3uVWgi88w&hl=ko&sa=X&ved=0ahUKEwif7PXtze_UAhXLvbwKHbqiArgQ6AEISzAL#v=onepage&q=%ED%9A%A8%ED%98%84%EC%88%9C%ED%99%A9%ED%9B%84&f=false|#]] 그중에는 '그대 없이 홀로 장수한들 아무 즐거움이 없을 것이라' 라고 말한 시도 있었는데, 그 시를 읊고 바로 이듬해 1월 건륭제 역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