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량(남북조시대) (문단 편집) == 개요 == [[후경]]의 난 와중에 [[양(육조)|양나라]] 황족 소찰은 [[서위]]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번국이 되기를 자청한다. 서위는 소찰을 양왕(梁王)으로 삼고, 후경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효원제]]를 공격해 죽인 후 소찰을 양나라의 황제에 앉히니 이것이 후량의 탄생이다. [[오대십국시대]]의 [[주전충]]이 세운 후량과 구분하기 위하여 '''서량(西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후량은 강릉 주변의 일부 지역만을 장악한 서위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양나라의 정사인 <[[양서(역사책)|양서]]>에서는 후량의 황제들을 본기가 아니라 소정덕, 소기, 소동, 소연명 등 괴뢰 황제와 함께 열전에 수록하고 있다. 후량은 서위을 대신한 [[북주]], 북주를 대신한 [[수나라|수나라]] 때까지 괴뢰 정권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북주와 수나라는 강남에 지배권을 넓히기 위해 [[진패선]]이 세운 [[진(육조)|진]](陳)이 양나라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정권이며, 그래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후량이야말로 정통성이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결국 후량은 남북조 통일 직전 [[수문제]] [[양견]]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 진나라 동양주 자사 소엄과 오주 자사 소환이 황제를 자칭하며 수나라에 대항했다.[* 소엄은 후량의 선제 소찰의 5남, 소환은 후량의 명제 소규의 3남이었다.] 이번에는 진의 괴뢰 정권이 된 셈이랄까. (얼마못가 진은 망했지만.) 또한 수나라 말기 파릉에서 거병하여 양왕을 칭했던 소선은 소엄의 손자였으며 그는 [[당고조]]에게 잡혀 참수되었다. [[당나라]] 때도 많은 양나라 황족 후손들이 등용되었다. 흔히 중국 지도에서 강릉에 자리 잡은 양이 바로 이 양이다. 흔히 남조의 양이 진에 의해 중앙에서 쫓겨난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잦지만 효원제를 정통으로 보는 양의 기준에서는 황제의 혈통만 같을 뿐 남조 양나라와 별개의 나라로 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