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삼국시대 (문단 편집) == 존재했던 나라 == [[삼국시대]]의 구도가 다시 재현되었다고 해서 후삼국시대라고 하지만, 이들 삼국이 각 지역을 중앙집권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고 [[호족(한국사)|호족]]들이 전국에서 판치고 있었다. 경남 일대에는 특히 군소 호족들이 세력을 모아 백제와 고려 사이를 왔다갔다했고, 고려와 후백제, 신라의 국경선에도 독립적인 호족 세력이 널려 있었다. 결국 고려, 후백제라고 해봤자 수도 인근에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정도였고 사실상 다른 지역은 이들에게 신종하는 호족들의 자치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 국경지대에 있는 호족들이 눈치를 보다 다른 나라로 이탈해서 붙는 일도 빈번했다. 이렇게된 이유는 옛 [[고구려]]나 옛 [[백제]]의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존 삼국시대의 유민의식 자체는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강하게 묶어줄만한 혈통 정통성을 가진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 가문들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삼국 시대의 지방 호족들 중에 대대로 이어져오는 족보를 가진 가문들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신라 중앙조정의 힘이 약해진 시기부터 힘을 키워서 생겨난 신흥가문들이었다.[* 난세에는 대부분 이렇게 신흥 중간계급이 두각을 드러내며 성장한다.] 그렇기에 많은 호족들은 이념이나 정통성보다는 주변 대호족들의 실제 힘의 균형을 보면서 어느쪽에 붙을지 저울질했다. [[궁예]], [[왕건]], [[견훤]] 등의 대호족들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조작까지 가미하면서 정통성을 내세웠지만, 당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주며 그들의 혈통이 섬겨야할 이유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만약 후삼국시대가 정체된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각 왕조에 다시 정통성이 생겼겠지만, 그러기 전에 한 세대만에 통일되었기 때문에 실력이 우선되는 시대로 끝났다. 이들 후삼국 외에 공식적으로 독립된 나라임을 선포한 세력으로 [[경명왕]]의 아들 사벌대군(沙伐大君), 박언창(朴彦昌)에 의해 세워진 [[후사벌국]](後沙伐)이 존재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후사벌국은 족보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신빙성 논란이 있다. 그밖에도 [[탐라국]], 중국에 독자적으로 통교한 호족 [[왕봉규]]나 승려를 보호하고 불교의 안식처를 만든 [[소율희]], 후삼국시대 막판까지 통제를 받지 않던 [[왕순식]] 등이 사실상 독립 세력으로 920년대, 930년대까지 있었다. 후삼국 시대의 사료가 부실하여[* 거란의 침입때 고려 초기의 왕조실록들이 완전히 소실되고 후대에 복원했기 때문에 후삼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실해졌다. 고려의 건국 태조인 왕건의 업적을 돋보이게 할 주적인 후백제의 인물들조차도, 국왕인 견훤을 제외하면 미비하여 이름과 관직명 정도 기록만 남아있다.] 알 수 없게 되었을 뿐, 실제로는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한 세력들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